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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 2세 교육에 진력하시는 한편 4245년 동성 무송현에서 중국인 둔전 삼백일경을 조차하여 망명 본국 위관을 규합 둔전을 경영하여 군자를 조달하고 조선 청장년을 모집하여 군사 교련에 전력하신 바 이는 후일 광복군의 모체적 역할이 되었다. 4256년 3월 조국 광복에 집조한 선생은 직접 행동으로 혁명을 일으킬 결심 하에서 왜적의 간담을 서늘케 한 의열단 폭탄사건에 참여하여 단장 김원봉 장군을 비롯 김지섭 김시현 유시태 홍종우 황옥 남정각 유석현 이현준 조황 백영무 유병하 등 제 선생과 모의 획책한 결과 천신만고로 폭탄 권총 조선혁명선언서 및 조선총독부 관공리에 대한 투항 권고문 등 많은 물량을 만주로부터 국내 잡입에 성공하고 거사 일보직전 왜경에 탐지되어 경기도 경찰부에 동지 12인과 함께 피검 서대문 형무소에서 2년간 옥고를 치르셨다. 이로부터 일제의 강압은 더욱 가혹하였다. 4260년 민족 단일당인 신간회 창립에 흔연찬동하여 중앙회 총본부 총무와 경상북도 지회장을 겸무하신 바 한때 도지회 산하에 30 세포와 만 여 회원을 포섭 활약하다 밀양에서 피검되어 일제말 발악적 민족 말살의 창씨개명에도 굴하지 않고 적극 반대하다가 고초을 감당한 것도 그 한 예라 하겠다. 4278년 해방과 더불어 본 도부지사를 거처 4279년 1월 초대 대구부윤에 취임하셨으나 군정 하 제약된 제 조건에 구속되어 마침내 뜻을 이루지 못하고 동년 6월에 퇴관하셨다. 조국의 완전 독립을 염원하여 동년 9월 대한독립 촉성회 경상북도 위원장에 피선 취임하였으나 이 또한 객관적 정세가 불리함으로 박력있는 후진에게 양보하고 4282년 7월 남선 경제신문사 사장에 취임하여 언론 창달에 힘썼으으니 그 장지는 후인에게 귀감이 되리라. 4282년 12월 4일 향년 70세를 일기로 영원 불귀의 길을 떠났으며 배 달성서씨 배 한양조씨로서 재화 재태 재춘 재우 재오 등 5자를 두고 여서로는 이범영 정인택 제씨이며 국가로부터 독립유공자로 국가 포상의 예우를 받았다. 명하여 이르건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