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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민의소 설치와 군민대회 경상북도의 신교육운동을 이끌어왔던 대구광문사가 선화당(경상북도 관찰부의 관청) 정문 앞의 공공건물에 있던 회관을 1906년 1월 경북의 관찰사 서리가 된 박중양으로부터 회수당하고 쫓겨나게 되었다. 일제가 선화당에 일장기를 내걸고 대구이사청 개청준비에 한창일 때, 달서교로 쫓겨난 대구광문사 문회원들은 대한제국은 있으되 국권이 없는 망국현실을 통탄하면서 대책을 숙의한 결과 이사청에 맞서는 자치단체인 대구민의소를 1906년 8월에 조직하게 되었다. 김광제, 서상돈 등 대구광문회 회원들은 단연국채보상을 주도하는 단체를 대구국채담보회라 칭하고 서문 밖 달서교 부근에 있던 수창사(지금의 대구수창초등학교 부근)에 국채지원금수합사무소를 설치했다. 이어 국채보상을 위한 첫 대구군민대회를 1907년 2월 21일 대구성 밖 북후정 아래에서 개최하고, 발의시 작성된 취지서를 낭독하였다. 이날 소노신사와 청홍부녀들과 술파는 아낙과 차 파는 노파, 앉은뱅이 걸인과 백정, 책을 낀 동자와 제기 차는 아이들까지도 강개하여 눈물을 흘리며 의기분발하여 당일 수합한 돈이 수 백 수십 원이나 되었다. 이처럼 열기에 찬 대구군민대회가 열리자 일제의 경상북도 경무부는 '무허가 집회이니 산회하라'고 압력을 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