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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黔丹山(검단산)의 정기를 타고 난 현민 유진오선생은 이나라 여명기에 법학 문학 사회 문화 교육등 각부분에 걸쳐 불멸의 공적을 쌓았고 개척자적 위업을 달성하였으니 한국 현대사에 우뚝한 거목이로다. 선생의 貫(관)은 杞溪人(기계인)으로 考 致衡公(고 치형공)과 妣 密陽朴氏(비 밀양박씨) 사이에서 1906년 丙午(병오) 5월 13일에 생하시니 天資英敏(천자영민)하여 어려서부터 신동의 소리를 들었다. 경기고 경성제국대학을 모두 수석으로 졸업하고 연구실에 들어가 학문을 연마했다. 그후 경성제국대 예과 강사 보성전문교수 와 법과 과장 경성대교수 고려대학교총장을 역임하는 동안 선생은 젊은 후학들에게 학문의 길을 열어주었고 만인의 사표가 되었다. 한편 선생의 문단생활에서 남긴 주옥같은 문학작품은 한국문학사에 찬연히 빛나고 있다. 선생은 우리나라 헌법학의 태두로 일찍이 1948년에 헌법기초위원이 되어 대한민국 건국사업에 참여하였고 이어 법제처장이 되었으며 여러 학술단체와 정부 또는 각계의 일을 자문 지도했다 만년에는 야당인 신민당의 총재로서 우리나라 정치발전과 민주투쟁을 영도하기도 했다. 현민선생은 天成(천성)의 人(인)이요 그 연원은 광주 검단산이라 하겠다. 선생의 11대조인 좌의정 兪泓(유홍)공은 임란전 선조21년 戊子(무자)에 검단산 동쪽 지금은 팔당호속에 잠겨져있지만 우촌리 한강변에 퇴우당을 짓고 은거하면서 당대의 명류 소재 노수신 사암 박순오 오음 윤두수 낙보 정돈 송강 정철 등 제현들과 어울려 詩酒(시주)를 즐기며 퇴우당 시첩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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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의 묘소 또한 검단산 서록 지금 하남시 산곡에 모셔져 있다. 爾來(이래) 4백주년 공의 후손들은 이 고장에 집성촌을 이루었고 현민선생을 탄생케하여 큰 일을 하게하였다. 마침내 1987년 丁卯(정묘) 8월 30일에 향년 82세를 일기로 찬란했던 생애를 마치었다. 이에 선생의 유덕을 사모하고 그 업적과 교훈을 선양 기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