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page


117page

유진오가 첫 시국 강연회에 오른 것은 소화(昭和) 15년, 즉 1940년 11월 25일이었다. 어느덧 성전(聖戰) 만 3주년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저 먼 대륙의 오지에서 모든 고통과 맞서서 싸우며 혁혁한 무훈을 세운 황군 장병 여러분에게 삼가 감사와 경의를 바치고자 합니다. …… 어떻게 하여 동아 신문화를 건설할 것인가…… 대단히 막막하고 곤란한 과제이긴 하지만 지금 저희들 조선에서 자란 사람은 조선이라는 특수성 때문에, 또한 이중으로 과제를 짊어졌다는 것을 깨닫지 않으면 안 됩니다. …… <삼천리> 1940년 7월호에 실린 ‘소감’이란 제목의 글이다. 이것은 현민이 쓴 글 중에서 친일을 하였다는 것을 가장 명확하게 알 수 있는 대표적인 것이다. 1941년 유진오는 국민총력조선연맹 문화부 문화위원에 위촉됐고, 같은 해 8월 12일 열린 문인협회 간부회의에서는 김동환, 박영희 등과 함께 상무간사로 위촉됐다. 이 당시 그는 친일잡지 <삼천리> 등에 친일 논문을 실었고(1940년 12월호, ‘일사불란의 그 훈련’), 학병 지원의 권유와 ‘대동아공영권’ 건설을 외치고 다녔다. 국민총력조선연맹에는 당시 친일문학자들이 만든 조선임전보국단이라는 단체가 발전적으로 해소하고 결합됐다. 조선임전보국단(朝鮮臨戰報國團)은 이름 그대로 조선에서 일본의 대동아전쟁을 위한 병력의 보충 등 선전·선동의 역할을 나서서 하였다. 유진오는 총력연맹 문화부에서 문화위원으로 활동하면서 결전소설 공모를 심사하였다. 그 외에 문단의 중요 행사로 1942년 이후 매년 1회씩 3회에 걸쳐서 개최된 ‘대동아문학자 대회’가 있었다. 이것은 대동아 문예부흥을 목표로 내걸었던 일본의 전시문화 공세의 한 종류였다. 여기에 대표로 참가한 사람 중에 두 번을 연이어 참석한 사람은 단 세 사람이었는데, 이광수와 쓰다, 그리고 유진오였다. 출처 : 부안독립신문(https://www.ibu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