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6page


146page

문익환 [ 약력 ] 1918년 만주 북간도 출생 1932년 은진중학교, 숭실중학교 재학 중 신사참배 거부로 중퇴 1976년 '3.1 민주 구국사건'으로 첫 투옥 1980년 '내란예비음모죄'로 세 번째 투옥 1985년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 의장 1985년 5월 서울대 강연 도중 이동수 동지 분신사건으로 인해 선동죄로 수배를 받고 자진출도 네 번째 투옥 1989년 1월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 상임고문 1989년 3월 방북 1991년 6월 6일 소위 '분신정국'에서 장례위원장을 맡는 등 활동, 형집행정지 취소로 재수감(여섯번째 투옥) 1992년 1월 노벨평화상 후보로 추천 1993년 4월 '통일맞이 칠천만 겨레모임' 운동 제창 1993년 8월 제4차 범민족대회 대회장 1994년 1월 18일 '새로운 통일운동체' 결성을 위해 전력하던 중 운명 [ 동지의 삶과 죽음 ] 문익환 목사는 한마디로 암울했던 과거 군사정권 시절을 거치며 줄곧 재야 민주운동을 주도해 온 정신적 지주였다. 성직자 집안에서 태어나 어릴 때부터 종교적 분위기에서 성장했던 사회진출 후에도 평범한 목회자로서 신학대 강단에 섰던 그가 유신정권의 압제에 분연히 맞서 민족민주운동에 첫발을 내딛은 것은 지난 1974년 10월 반유신 재야단체인 '민주회복국민회의'에 참가하면서 부터였다. 1989년 초 전민련의 출범 후에는 전민련 고문을 맡는 등 재야운동의 대부로서 큰 업적을 남겼다. 문익환은 1989년 3월 통일문제를 북한의 김일성 주석과 직접 논의하기 위해 방북하였다. 이 사건은 통일을 구두선처럼 외치면서 실제로는 탁상공론만 일삼았던 당시 정부 당국자들을 준엄하게 꾸짖고 또한 민족의 통일우지를 온 민족에게 호소하기 위한 의거였다. 그는 기회만 있으면 '분단 50년 이내에 통일을 이루지 못하면 분단이 고착된다'며 통일운동에 남다른 집념을 보였다. '통일은 됐어'라고 힘주어 외치던 문익환은 유신의 압제에 분연히 맞서고 이후 치열한 반독재 투쟁과 통일운동으로 일관해 온 민족의 큰 별이었다. 한신민주동문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