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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열(朴烈)은 경북 문경(聞慶) 사람이다. 1919년 경성고등보통학교(京城高等普通學校)에 재학할 당시 3·1독립운동에 가담한 혐의로 퇴학당하고 그해 10월경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東京)의 정칙(正則)영어학교에서 수학하였다. 1921년 5월 동경(東京)에서 김약수(金若水)·조봉암(曺奉岩)·김종범(金鍾範) 등과 흑도회(黑濤會)를 조직하였으나 김약수·조봉암 등의 공산주의와 사상적으로 대립되어 해산하고 장상중(張祥重)·홍진유(洪鎭裕) 등과 흑우회(黑友會)를 조직하여 활동하였다. 1922년 4월 정태성(鄭泰成) 등 동지 16명과 일본 제국주의 타도 및 악질적인 친일파를 응징하기 위하여 무정부주의를 표방하면서 적극적인 활동을 전개하였다. 1923년 9월 일본 황태자의 결혼식에 참석하는 천황을 비롯하여 황족과 내각총리대신, 조선총독 등을 폭살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이의 실현을 위해 폭탄을 구하기 위하여 중국 상해(上海)로 동지 김중한(金重漢)을 파송하다가 붙잡혔다. 이에 1926년 3월 폭살계획으로 인하여 일본 대심원에서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1926년 4월 5일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어 20여년간 옥고를 치르다가 1945년 10월 17일 전승국인 맥아더 사령관의 포고령에 의하여 출옥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89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출처 : 보훈처 공훈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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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네코 후미코(金子文子)는 1922년 2월부터 박열과 의기투합하여 일본 제국주의에 반대하는 활동을 시작하였다. 5월 경 흑도회에 가입했고 7월부터는 박열과 함께 기관지 『흑도』의 발간책임을 맡았다. 9월에는 흑우회를 조직해 사상연구와 연설회 등을 추진하면서 기관지 『민중운동(民衆運動)』을 한글로 발행하였다. 12월에는 『후토이센진』을 창간했고, 1923년 3월 『현사회』라는 이름으로 개칭하여 지속적으로 발간하였다. 1923년 4월 무정부주의 운동가들을 규합하여 불령사를 조직하였다. 불령사는 한국 내 형평운동을 지지하는 한편 노동운동을 적극 지원하는 등 무정부주의에 입각한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이즈음 의열단과 함께 의열투쟁을 추진했는데, 폭탄을 도쿄로 반입하여 일왕과 정부 요인을 암살하려는 계획을 세우기도 했다. 1923년 9월 도쿄대지진 직후 보호감속 명목으로 도쿄 세타가야(世田谷) 경찰서에 구금되었다. 취조 도중 폭탄 반입 사실이 알려지게 되어 이른바 ‘대역사건’의 주모자가 되었다. 구금 중 박열과 결혼하고 일제 사법당국을 향해 항일 활동을 떳떳하게 항변했으며 재판 중 만세를 부르기도 하였다. 1926년 3월 25일 대심원 제1특별형사부에서 이른바 ‘형법 제73조(大逆罪) 및 폭발물취체규칙위반’ 등으로 사형을 선고받았다. 4월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어 옥고를 치르던 중 옥중에서 순국하였다. 정부는 2018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출처 : 보훈처 공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