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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1919 일본은 한일합방을 전후하여 침략에 항거하는 의병전쟁과 애국계몽운동을 무자비하게 탄압하고 강력한 무단정치를 펴는 한편, 민족고유문화의 말살, 경제적 침탈의 강화로 전체 조선민족으 생존에 심각한 위협을 가했다. 회사령과 토지조사사업(1910~18)으로 조상전래의 토지를 빼앗기고 빈농,소작농으로 전락, 극히 일부 지주층을 제외하고는 절박한 상황에 몰리게 되었다. 미국대통령 윌슨이 전후처리를 위해 〈14개조평화원칙〉을 발표하고 민족자결주의를 제창함에 따라 이 괴흘 이용한 지식인, 종교인들이 불길을 댕기자 항일민족운동은 삽시간에 거족적인 운동으로 번져나가게 되었다. 손병희를 대표로 하여, 천도교, 기독교, 불교의 지도적 인사로 구성된 민족대표 33인은 3월 1일 오후 2시 정각 인사동의 태화관에 모여 한용운이 독립선언서의 낭독을 끝내자 만세삼창을 부른 후 경찰에 통고하여 자진 체포당했다. 한편, 파고다공원에서는 5천여명의 학생들이 모인 가운데 정재용이 팔각정에 올라가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만세를 부른 후 시위에 나섰다. 이들의 시위행렬에 수만의 시민들이 가담함으로써 서울시내느 흥분된 군중과 만세소리로 들끓게 되고, 만세운동은 삽시에 전국적으로 번져나가, 전국 방방곡곡에서 독립만세와 시위운동이 전개되기에 이르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