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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강과 일제의 만행으로 국운이 풍전등화와 같았던 시기였다. 단발령이 선포되고 국모(國母)가 시해 당하자 전국에서 의병이 세차게 일어났다. 선생은 중암(重菴) 김평묵(金平黙). 성재(省齋) 유중교(柳重敎) 선생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는데, 동문으로 존경하던 의암(毅菴) 류인석(柳麟錫) 선생이 이끄는 호좌의진(湖左義陣)에 투신하여 일제에 위협받던 나라를 지키고자 고군분투하였다. 선생은 "나라를 사랑하고 오랑캐를 물리치는 의거에 누가 창의(倡義)하지 않으며, 원수를 갚고 형세를 보존하는 일에 누가 거사(擧事)하지 않겠는가? 오늘의 일을 차마 어찌 다 말로 하랴! 일을 도모하매 우리가 죽지 않으면 그만이고, 죽는다 해도 대의(大義)를 펴서 천하를 구하기 위해 죽는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어경선 선생은 심재 선생의 둘째 아들로 1869년 2월 5일 출생하여 1916년 7월 21일 서거하였다. 묘는 이 곳 오천리 뒷동골에 있다. 선생은 성남시 수정구 고등동에서 태어나 부친을 따라 남하하여 오천리에서 살았다. 선생 역시 성재(省齋).의암(毅菴) 두 분 선생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는데, 학문의 경지가 깊고 정밀하여 유림에 명성이 높았다. 선생은 청주.가덕.옥천 등의 마을에서 강학을 하는 한편 을미의병 때(1895년) 호좌의진에서 아우 중선(中善)과 함께 부친을 따라 여러 전투에 참가하여 고초를 겪고 공을 세웠다. 의암 류인석 의병장이 중국으로 1차(1896년).2차(1898년) 망명을 할 때, 선생은 스승 류인석 의병장을 수행하여 동지들과 온갖 풍찬노숙(風餐露宿)의 고초를 함께하였다. 이 때 선생의 부친 심재 선생은 류인석 의병장이 2차 망명을 계획할 때 함께하자 약속하고 준비하던 중 갑자기 서거하였다. 아! 일제의 국권침탈에 항거하여 한 몸과 가정을 돌보지 않고, 오로지 조국 독립을 위해 헌신하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