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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은헌(宋殷憲)은 충북 보은(報恩) 사람이다. 유인석(柳麟錫) 의진에 군자금을 지원하고, 1919년 항일문구의 제문으로 일제에 붙잡혀 옥고를 치렀다. 송은헌은 일찍이 어윤적의 문하에 수학해서 학문이 정심(精深)하고 신독근수(愼獨謹守)하였다 한다. 그러던 중 1895년 일제가 국모를 시해하는 을미사변(乙未事變)을 일으키더니, 이어서 친일정권을 사주하여 단발령과 복제개혁을 단행하였다. 이 때 그는 을미사변의 변보(變報)를 전해 듣고 비분강개하여 복수보형(復讐保形)의 4자를 머리맡에 걸어 두고 그 기회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그런데 마침 일제와 친일정권에 의해 을미개혁(乙未改革)으로 단발령까지 강행되자 그 분노는 폭발하여 토역복수(討逆復讐)를 부르짖고 의병을 일으키게 되었다. 그런데 이 때의 의병은 유생이 주체가 되었으므로 그 사상적 배경도 위정척사(衛正斥邪)를 이념으로 하고 존왕적(尊王的) 성격을 띠고 있었다. 전국적으로 일어난 의병 중에도 유인석 의진은 가장 전투적 성격을 띠고 활발하게 의병항쟁을 전개하고 있었다. 이에 그는 유인석 의진에 직접 참여하기보다는 지속적으로 군자금을 지원하기로 하고, 유인석 의병진에 3백 냥의 군자금을 제공한 이후 수십 차례에 걸쳐 군자금을 제공하였다. 그 후 1910년 주권이 상실되자 유인석 의병장을 따라 만주로 망명하려 하였지만, 스승 어윤적이 때가 좋지 않다고 극구 만류함에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그러던 중 1919년 유인석 의병장을 기리는 항일문구의 제문으로 일제에 붙잡혀 고초를 겪었지만, 그는 옥중에서도 "오늘날 옥중에서 북쪽을 바라보며 홀로 작은 충성을 바치며 웁니다"라는 옥중시를 짓기도 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출처 : 보훈처 공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