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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봉길의사 암장지 적 윤봉길의사는 소년때 일본식민지 교육에 압증을 느껴 자주 퇴학 후, 서당, 서숙에 들어 사서삼경, 한학 수득하여 귀농운동에 정열을 태웠다. 광복을 위해 중국에 망명 1932년 4월 29일 상해 홍구공원에서 거행된 천장절겸 전승 축하식전에 폭탄투척, 일본군국주의를 응징한 독립운동의 투사이다. 군법회의에서 사형판결후, 상해파견 주력인 제9사단의 가나자와에 연행, 미쓰코지야마(三小牛山) 공병작업장에서 동년 12월 19일 오전 7시 40분 총살형. 장렬한 24세 6개월의 짧은 생애를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유체는 형법의 절차를 무시 비밀암장, 묘비도 없이 13년간 부지한 많은 사람들의 발에 짓밟혔다. 오호! 원한 많은 유체는 1946년 3월 재일동포 연 200여명 정성어린 노력으로 쓸쓸한 이 자리에서 발견, 한국에 동년 7월 7일 영웅으로서 국민장으로 안장되었다. 암장은 식민지지배에 인한 사건의 증거, 은멸과 역사의 말살이였다. 이 사실과 윤봉길의사의 얼을 계승 한일간의 불행한 과거사를 깊이 명심 우호친선을 원하여 사적으로 보존공사하였음. 보존사적에 다음 협력이 있음. 휘호, 재일서예가, 한시작가 수당 신인홍, 윤봉길의사 농촌운동 모체인 한국의 월진회 회장 윤규상 박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