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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봉길의사 순국기념비 해설 순국기념비 건립취지 이곳은 대한인 윤봉길의사가 순국한 곳이다. 의사는 1932년 4월 29일, 일본군 점령하의 상해에서 개최된 천장절. 전승기념식전에 폭탄을 전져 일본군 수뇌를 살상한 죄로 동년 12월 19일 오전 7시 40분, 이곳 노다산에 총살형을 받고 24년간의 짦은 생애를 마치셨다. 의사께서는 1908년 6월 21일 지금의 대한민국 충청남도 예산에서 출생하였다. 당시 대한제국은 일본제국의 침략을 받은 시기였고, 1095년 을사보호조약에 국권을 빼앗겨 1910년에는 드디어 한일합방이 강제되어 한반도 각지에서 많은 애국지사가 항의의 자결, 항일구국투쟁을 넓여가고 있었다. 그러한 항일투쟁의 대표적인것이 1919년 3.독립운동으로 한반도 전역에서 실제 200만명이 넘는 사람이 참가하여 사상자 수만명과 투옥자 오만명을 넘는 희생을 치루었다. 의사는 이러한 3.1운동의 영향을 받아 국권회복을 목표로 농촌계몽을 위하여 야학을 개시하기도 하고, 청년들을 조직하여 약소민족의 해방과 자유평등을 추구하고, 애국사상의 함양과 독립정신을 고취시켰다. 의사는 1930년 3월 6일 드디어 "장부출가 생불환"의 유서를 남기시고 일제점령하의 조국을 뒤로하고 망명의 길로 들어 만주, 청도를 경유하여 익년 상해에 도착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김구 부주석과 운명적인 만남을 하게되었다. 1932년은 일본의 대륙침략기로 전년도의 만주사변에 이어서 1월에는 상해사변, 2월에는 상해점령, 3월부터는 만주국이 탄생한 해이다. 이렇게 대륙침략의 승리를 축하하는 축제가 4월 29일 상해 홍구공원에서 개최되는 천장절 전승기념식이다. 의사는 이 시전을 분쇄하는것이 일본군의 대륙침략을 저지하는 절호의 기회로 결심하셨다. 의거에 임한 의사의 단호한 신념은 김구 부주석의 앞에서 선서한 대한인 애국선언문과 직전에 남기신 유시에 매우 잘 표현되어있다. 이 의거는 즉시 전세계에 전해져 일본제국의 침략행위를 알렸을뿐만 아니라 국내외의 동포를 결속시켜 독립투쟁에 총 궐기에 돌입하게 하였다. 또 한국의 독립운동에 중국의 지원태세를 끌어내게 하였고, 익년 일본은 국연을 탈퇴에 이은 국제여론의 변화, 후의 카이로선언에 대한제국독립을 넣게 하는등의 결과를 가져왔다고 이야기 되고 있다. 의사는 자폭을 시도했지만 실패하고 대한독립만세를 부르짓다가 현장에서 체포되어 참혹한 고문을 받은후 군사재판애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사형선고시에도 의사께서는 민족독립과 동양평화를 주창하였고, 재판관을 힐책하시고, 형장에서 이 세상을 떠나실때에도 조국의 광복을 강하게 믿으시는 자세를 견지하셨다. 의사의 이러한 애국일념과 불굴의 의연한 자세에 통역을 담당했던 일본군 법무관 삼도중위는 마사시구 의사라고 존경을 표현하여 본인이 희망한 총살형이 집행되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의사의 유해는 긴 세월동안 이 가나자와에 방치되어있다가 광복후 1946년 3월 9일, 재일동포들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발굴되어 동년 5월에는 조국으로 봉환되어 전국민이 추도하는 가운데 국민장으로 서울 효창공원에 안장되셨다. 의사께서 순국하신지 60주년, 의사가 열망하시던 조국광복은 되었지만, 한일양국은 새로운 우호를 향해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의사를 추모하는 동시에 한일간의 불행했던 과거 역사의 기록으로 남겨 희망의 미래를 향한 좌표가 되기위하여 "매헌 윤봉길의사 의거 60주년기념사업 추진위원회"의 지원과 박영석 한국 국사편찬위원장의 근찬, 김응현의 근로서 순국기념비를 이곳에 세우게 되었다. 1992년 4월 21일 재일본 대한민국 거류민단 일본어 해설비 건립취지 2002년 세계최대의 스포츠 축전인 월드컵대회가 아시아에서 처음으로 사상 최초로 공동개최로 한일 양국의 개최되어 결승토너먼트에 진출하는등 성공리에 마무리되었다. 동시에 한일양국민들도 이제까지 이상의 민간레벨의 교류를 찾게 되었다. 이 월드컵 대회를 계기로 한일양국민이 과거의 역사인식을 같이하고 동아시아 평화의 향하여 새로운 파트너십 구축하는 제1보로 디디게 되었다. 이 노다산은 과거의 불행했던 역사를 바로잡아 윤봉길의사의 비석이 건립되게 되었다. 그로부터 금년에 건립 10주년, 순국 70주년에 이 기념비 전체를 의사께서 주창하신 동양평화와 한일우호를 목표로 많은 사람들이 의사를 이해할수 있도록 여기에 건립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