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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은 사천 읍성터이다. 사천의 옛이름이 사물 사수 동성 등이었는데 조선 태종때부터 사천이라 하였다. 세종 24년 1442년에 영의정 황희 등이 주청해서 이곳에 돌로 성을 쌓기 시작하여 3년후 1445년에 완성시켰다. 성의 둘레 3015척 2곳 치, 적대 15곳과 성문마다 옹성을 쌓았다. 그 뒤 개축하여 성의 둘레 5015척 높이 15척을 쌓았고 우물 4군데 못 2군데가 있었다. 성문을 동문 서문 남문이 있었는데 재양문 숙금문 주안문이라 하였다. 성안에는 동헌인 부계헌과 객관을 비롯하여 제경루 침오정 등 많은 공공건물들과 민가와 시장이 있었다. 이 읍성은 순조때까지 성의 형태를 갖추고 있었으나 성벽과 시설물이 급격히 훼손되어 산부분만 겨우 읍성터로 남아있게 되었다. 당시의 동문은 선인리, 서문은 정의리 남문은 평화리에 위치했다. 이 읍성은 사천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군사의 중심지였다. 이곳을 중심으로 사천현의 경계가 동쪽으로 23리 서쪽으로 5리 남쪽으로 25리 북쪽으로는 6리 서울까지 973리였고 세종시대 인구는 307호 1817명이었다. 당시는 농업과 어업이 중심이어서 성안시장에 농수산물과 공물로 보내는 인삼 등이 출하되었다. 사천이 내려다 보이는 이곳에서 문인들은 눈을 들어 멀리 지리산으로부터 금락산 이명산 등을 노래하였고 눈을 내려 바다 물결의 출렁거림을 읊었다. 이 고장 사람들은 자연을 사랑하고 무예를 숭상하여 호연지기와 충의심을 길렀다. 읍성은 군사적으로도 왜구의 침입에 대한 중요한 방어지역이었다. 임진왜란때 경상우병사 정기룡 장군은 이곳에서 크게 승리를 거두었다. 오늘날 이 곳에 성곽을 다듬고 길을 내고 정자도 지어 읍성은 사천시민의 휴식공간으로 이용되고 있다. 눈 아래 굽어보던 들판은 시가지가 되고 열물다리 십수교가 있던 자리는 공항의 가장자리가 되었다. 유구한 역사를 가진 이 읍성은 사천의 영욕과 나라의 흥망성쇠를 보여주는 증언대이며 자랑이다. 동헌 부경헌에 경쇠소리가 울리기 시작한지 오백여년 당시의 흔적은 희미하고 인물은 역사와 더불어 흘러갔지만 이 터전 아래 연면히 이어온 전통의 뿌리는 읍성과 더불어 사전의 자부심으로 길이 남을 것이다. 2천년 이른 여름에 이 성이 내린 혜택을 보전하여 길이 후세에 전하고자 시민의 뜻을 모아 돌에 새겨 이 곳에 세워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