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page


6page

형조정랑이요 호는 성재이다. 이퇴계 조남명 김하서 제 선생과 도의로 사귀셨다. 그 아드님 수개공과 수회찰방공형제가 퇴도문하에서 수학하였고 임란에는 김학봉 선생과 함께 왜적과 싸웠다. 위의 3세4현이 창녕구니서당 4현사에 봉향되셨다. 증조는 석규이시고 조부는 호귀이신데 호는 벽계이다. 아버지는 원동이신데 옛 군자의 의풍이 계셨다. 어머니는 광주노씨이니 학문의 따님이다. 공은 고종 을해 1875년 12월 25일에 계팔향제에서 나셨다. 어려서부터 뛰어나게 영리하셨고 호매한 기상이 있었다. 글을 배우는데 처마에 봄 제비가 날거늘 선생이 시구를 만들라고 하니 「연함춘신어강남」이라 제비가 봄소식을 머금고 강남을 이야기한다 하였다. 어른들 이 그 의사가 좋다고 칭찬하였다. 열두살때 병술년 아버지께서 돌아가시니 집상하는 절도가 성인과 같았다. 또 중부의 상고가 계셨고 이때 가운이 기울면서 공이 가사를 돌보게 되었다. 수신제가를 위하여 소학을 가까이 하고 효경과 서경을 즐겨 읽었다. 1903년 계묘에 국정이 문란하면서 도적떼가 창궐하여 침범을 입었는데 공이 지혜로 위험을 모면하고 평성으로 옮겨 사시니 방여 면우 교우 강제 공이 조부 벽계공과 도의교로 왕래하셨다. 밤에는 공이 모시고 강설을 들으매 학문이 더욱 성취되었다. 또 맏아들 황식을 일두 선생댁으로 장가를 들이면서 개평리에 옮겨사시다가 고향에 돌아오니 강우 선비들이 시를 지어 전송하였다. 조부의 벽계유집을 정리하였고 평일 머무신 장소에 정자를 지으니 벽계정이다. 또 수계를 닦아 매년 봄에 강회를 가지고 또 족친의 돈목을 기하였다. 1919년 봄 국상이 나자 경향에서 독립운동이 일어났다. 고등경찰요사에 의하면 동년 3월 18일에 창녕군에서 파리강화회의에 제출할 독립청원서 서명활동에 관련되어 곽면우 장회당 조심재 제공과 함께 대구감옥에 구검되어 8개월의 옥고를 치루었고 또 1920년 2월에 창녕독립만세사건을 주동하여 조심재 긍섭에게서 지은 선언서를 인쇄 배포하기 위하여 수천매를 인쇄하여 3월 8일 장날을 기다리다가 발각되어 체포되니 모친에게 말하기를 국가민족을 위해 죽을 명분을 얻었으니 슬퍼하지 마십시요 하니 어머니께서 내 일찍이 과부가 되어 죽지 않은 것은 너 때문이니 반드시 살아오라 하셨다. 공이 대구형무소에서 재수감되자 옥리가 상투를 자르려고 하니 내 목을 자르기 전에는 못 자른다고 호통을 쳐서 모면하였다. 1927년 정묘 12월 15일에 서거하시니 향년 53세이다. 배위는 첨원윤씨 인학의 따님이신데 정숙하신 부덕이 계셨다. 갑술 8월 초 9일 나시고 1926년 3월 21일에 별세하여 성산면 덕곡복호등에 합폄되셨다. 4남2녀를 두었으니 황식 광식 용식 재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