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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은 1907년 4월부터 국권회복을 부르짖는 격문을 발표하였고, 1907년 7월에는 의병장으로 활동했으며, 1900년에는 시조 고운선생의 영정을 이봉했다. 1905년 을사늑약에 분개하여 국권회복을 위해 1906년 산남의진에 참전하였다. 1906년 4월 산남의진의 대장 정용기가 신광면 우각전투에서 경주진위대의 간계로 체포당할 때 공도 연루되어 일본군의 악형에 하반신 불구가 되었다. 1907년 4월부터 일본의 침략을 비판하고, 국권회복을 부르짖는 5회의 격문을 발표하였다. 즉 천하에 고시하는 글(1907.4).국채상환 건(1907.5). 단발령의 건(1907.7). 애급근대사를 읽고 대한국의 위급함을 탄함(1908.1). 국체로서 적국을 토벌할 건(1908.1) 등을 통해서 국민의 충성심과 애국심을 고취시켰다. 1907년 7월경 청도 적천사의 의병 70여 명으로 창의 의병장으로 청도.영천 등지에서 활동하였고, 1908년 6월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대구경찰서에서 심문과 악형을 받았다. 가족은 만주로 망명하였으며, 1909년 이후에는 해인사에 은거했고 신병이 무거워 밀양에 거주하는 사위 박재하의 치료와 요양을 받았으나 1917년 10월 26일에 사망.순국하였다. 1900년 해인사에 소장된 보물급 문화재 정리에 동참한 공이 고운선생의 영정을 서장각에서 발견하고 주지승 벽운과 방장회에 공의한 결과, 경주최씨 문중에서 봉안할 사항으로 결의되어 영정을 품에 안고 일곡에 이봉하고, 현 계동사에 봉안하여 숭조정신을 더 높혔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7년 광복절에 건국포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