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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넓다하나 내 조국은 둘이 없고 인류 많다하나 내 민족은 하나뿐인 것이다. 조국이 강탈을 당하고 이 민족이 압박에 처할 적 천지가 다하도록 우국의 지절보다 더 클것이 없고 고금이 끝나도록 애민의 의리보다 더 중할것이 없다. 이 지절은 곧 충성에서 남이요 이 의리는 곧 정기에서 솟음이니 이 지절과 의리를 겸함 사람이 있다면 그는 마땅히 국가적 대우와 민족적 추대가 있어야 할 것이다. 이 같은 대우와 주대를 받을만한 사람이 진양 금산면 현지리에 있으니 그는 바로 석재 강공이었다. 공의 이름은 용수이요 자는 무일이니 고려태사 은열공과 조선충신 매촌공이 현조요 조부 우중은 호를 아석이니 통정대부 중추원 의관을 지냈고 부친 순은 호를 부봉이니 재벌이 향내에 유명했으며 모친은 전주최씨 동식의 따님이니 고종 무인에 공을 낳았다. 공이 어려서 공부할 적 총명도 있었거니와 담이 크고 말을 잘 했다. 국치를 당한후 책을 덮고 탄식하기를 "나라 없는 백성이 글 읽어 무었하나"하고 이로부터 서울로 오가면서 오공 세창과 사귀어 구국의 뜻을 통하고 자주 연락이 있었더니 기미3.1운동이 일어날 때 공의 나이 열 여덟이었다. 오공으로 부터 은밀히 전해 온 독립선언문과 그에 따른 격려의 서간을 받고 정종식씨와 함께 밞이면 태극기를 만들고 낮이면 원근 지역에 다니며 동지를 규합하는 한편 민중을 선동하기 시작했다. 들뜬 의기에 혹 밤을 짖었고 뛰는 열혈에 혹은 잠을 몰랐다. 그리하여 면내 각부락 부노들도 공의 열렬한 성의에 크게 감동하여 촌락 사람들을 지도하게 되니 그로써 대의에 피가 끓는 면민들은 마침내 일어났다. 3월 21일 진주 장날을 기회로 하여 금호황장에 모여든 군중이 무려 수천명에 달했으니 면내 어느 집을 물론하고 아니 나온 사람이 없었다. 공이 선두에 나서사 독립선언문을 낭독한 다음 태극기를 뿌리며 독립만세를 높이 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