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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진주시 하촌동 222 하촌마을 애국지사 김재화선생 사적지를 찾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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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3월 18일의 진주 장날을 이용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였다. 그는 전국적으로 독립만세운동이 전개되고 있음을 알고, 이강우·권채근·강달영·박진환·박용근·강상호 등과 만나 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하고 3월 10일경, 독립선언서와 격문을 제작하여 비밀리에 배부하였다. 이 사실을 눈치챈 일본군경은 삼엄한 경계를 하며 각 학교에 임시 휴교령을 내리고 타지방에 사는 학생들에게는 여비까지 주어 강제 귀향시키는 한편, 일본인 교사들로 하여금 학생들을 정탐하도록 지시하였다. 이같은 상황에서도 그는 다른 동지들과 함께 조직을 확대시켜 나가면서 광림학교의 악대원으로 활동하다가 졸업한 천명옥·박성오·김영조·이영규 등에게 시위행진 때의 주악을 부탁하였다. 3월 18일 오후 1시경, 이영규가 비봉산에 올라가 불어대는 나팔소리를 신호로 3개지역에 분산되어 있던 시위대열은 악대를 선두로 일제히 독립만세를 외치며 행진을 시작하였다. 사태의 절박함을 느낀 일제는 헌병과 경찰력만으로는 이를 저지할 수 없게되자 소방대까지 출동시켜 물감과 오물을 뿌리며 곤봉으로 시위군중을 난타하였다. 오후 4시경, 이같은 일제의 폭력저지도 물리치고 경상도청 앞에 모인 시위군중은 3만여명으로 늘어났다. 그러나 저녁 무렵에 일제는 옷에 물감이 묻은 사람들을 중심으로 대대적인 검거작업을 시작하였다. 이때 3백여명의 체포되었는데, 결국 그도 함께 체포되었으며, 이해 6월 17일 대구 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3년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르다가 병으로 형집행정지되어 1920년 3월 29일 출감하였으나 1920년 4월 15일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출처 : 보훈처 공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