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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익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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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심하니 공은 일절의 상종과 협력을 거절하고 근검절약의 치가에만 전념하는 일방 숭조와 목족만이 민족정기의 계승임을 단정 일족을 독려하여 숭의당을 건립 백촌 현조를 비롯 열선조의 봉향에 힘쓰는 동시 본인의 자손은 객지로 피시시켜 징용병을 면탈하고 물자의 공출에도 일절 불응하매 왜정의 박해가 극심하고 드디어 단발불응을 구실로 왜경은 공을 체포 투옥하였다. 공은 불생환을 각오하고 떠나면서 家眷(가권)에게 장사준비를 당부하고 옥중에서 '나는 대한의 유민이다, 여국은 자고로 讐邦(수방)이니 결단코 협력할수없다'라고 단식으로 항거하니 일경은 갖은 협박과 회유를 구사하면서 강제로 삭발코자하나 공의 '차라리 내 목을 쳐라'하는 대갈에 감히 뜻을 이루지 못하고 아사가 겁이나서 주여에 석방하니 공은 태연하게도 '七日不食即死가 겁이나서 이러느냐'하고 당당하게 40여리 길을 도보로 귀가하니 그 기개에 모두가 감탄하고 이에 내도한 시서도 수십편에 이르렀다. 공은 체력 또한 강건하여 평소에 와병하는 일이 없었으며 원근의 출입에도 승차하는 일이 전무하고 근 백여리 정도는 시간여에 도보하니 모두가 그 보행력에 탄복하였다. 조국광복의 기쁨에서 환국한 이승만박사를 환영면담코저 천리의 서울 길을 도보로 환행한 일은 세인을 놀라게 하였다. 때에 천지가 해방의 환희에 도취하나 공은 더더욱 냉철하며 불구영명으로 수신제가에 힘쓰고 권농가를 지어 향민을 계도하니 그 명성이 사방으로 전파되어 원근의 후학들이 다투어 사사하매 동몽을 위시 청장년에 이르도록 제가 수백명에 이르렀다. 공은 평생을 일관하여 영리를 불원하고 사심없이 후학과 일족을 계도 하면서 그 소신과 교계의 뜻을 담은 시문으로 유집을 남기시고 민국병오년(1966) 3월 15일 향년 84세로 종천하니 이떄에 집불하는 이가 수백에 이르렀다. 오라 공 몰후 근 한 세대가 지난 지금 그 위대한 생애가 망각될까 두려워 비를 세워 길이 남기고자 뜻있는 제자들의 수의하에 그 대표 박용덕보가 비문을 간청하기에 그 성의에 감동하여 불녕이 팔질(八耋)의 혼미와 불문을 무릅쓰고 김녕김씨 경남종친회 호연회장이 ○한 바의 행장에 따라 여우약술하고 삼가히 명하며 이르노니 심원한 연원에 빛나는 명문이요 강건한 체력에 고매한 기개였네 왜정의 포악을 의지로 이겨내고 애국과 위선의 성을 다하였네 굳은 의지로 세속에 초연했고 소신으로 일관하니 만인의 귀감이네 자애로운 교훈으로 후진을 계도하니 향린과 제자들이 흠모하고 경앙했네 恩과 德을 쌓으시어 雲仍(운잉)이 대창하니 높은 가상과 영명이 영세무궁하리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