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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재 강용수 기념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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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준교 선생은, 경상남도 진양(晋陽) 사람이다. 1919년 3월 18일의 진주 장날을 이용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였다. 그는 전국적으로 독립만세운동이 전개되고 있음을 알고, 이강우(李康雨)·김재화(金在華)·강달영(姜達永)·박진환(朴進煥)·박용근(朴龍根)·강상호(姜相鎬) 등과 만나 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하고 3월 10일경, 독립선언서와 격문을 제작하여 비밀리에 배부하였다. 이 사실을 눈치챈 일본군경은 삼엄한 경계를 하며 각 학교에 임시 휴교령을 내리고 타지방에 사는 학생들에게는 여비까지 주어가며 귀향시키는 한편, 일본인 교사들로 하여금 학생들을 정탐하도록 지시하였다. 이같은 상황하에서도 그는 다른 동지들과 함께 조직을 확대시켜 나가면서, 광림학교(光林學校)의 악대원으로 활동하다가 졸업한 천명옥(千命玉)·박성오(朴星午)·김영조(金永祚)·이영규(李永圭) 등에게 시위행진 때의 주악을 부탁하였다. 3월 18일 오후 1시경, 이영규가 비봉산(飛鳳山)에 올라가 불어대는 나팔소리를 신호로, 3개 지역에 분산되어져 있던 시위대열은 악대를 선두로 일제히 독립만세를 외치며, 행진을 시작하였다. 사태의 급박함을 느낀 일제는 헌병과 경찰력만으로는 이를 저지할 수 없자, 소방대까지 출동시켜 물감과 오물을 뿌리며 곤봉으로 시위군중들을 난타하였다. 오후 4시경, 이같은 일제의 폭력제지도 물리치고 경상도청 앞에 모인 시위군중은 3만여명으로 늘어났다. 그러나 저녁 무렵에 일제는 옷에 물감이 묻은 사람들을 중심으로 대대적인 검거작업을 시작하였다. 이때 3백여명이 체포되었는데, 결국 그도 함께 체포되었으며, 이해 6월 17일 대구(大邱)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3년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에는 동아일보 진주지국장으로서 민족계몽을 계속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68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 출처 : 보훈처 공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