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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익봉은 1943년경 경남(慶南) 진주군(晋州郡) 진주공립중학교 재학 중 박노근(朴魯瑾), 김상훈(金相勳), 강필진(姜必鎭) 등과 광명회(光明會)를 조직하였다. 광명회는 독서써클로 우리 역사를 공부, 토론하고 일제에 저항할 수 있는 투쟁을 전개하기로 결의한 단체였다. 이들은 평소 절친한 친구 사이로, 특히 박노근의 아버지와 하익봉의 삼촌이 독립군으로 활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 졸업 후에는 모두 독립군에 가담할 것을 약속하였다. 그러던 중 하익봉은 1944년 9월 진주공립중학교 학생들과 함께 진해비행장(鎭海飛行場) 건설공사 현장 강제노역에 동원되었다. 이들은 천막으로 지은 막사에서 공동숙식을 하며 온갖 중노동에 시달렸다. 이러한 악조건 속에서도 하익봉은 학생들에게 우리말 사용을 생활화할 것과 독립군의 활약상을 전파하는 등 민족의식 고취를 위해 활동하다가 9월 23일 동지들과 함께 일본헌병대에 체포되었다. 하익봉은 진해헌병대 영내에서 약 40일 동안 구금된 체 학교 내외에 퍼져 있는 항일운동과 조선독립을 위한 써클활동의 사실유무 등의 자백을 강요받으며 갖은 고문을 당하였다. 1944년 11월 7명의 동지들과 함께 군용트럭편으로 부산지검에 송치되어 이른바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부산형무소에 투옥되었으나 고문의 후휴증으로 신음하다가 1945년 4월 28일 옥중에서 순국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1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 출처 : 보훈처 공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