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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이웃 일본이 서양의 발달된 문물을 우리보다 일찍 받아들여 과학기술을 응용하여 19세기 후반에 이르면 국방력을 크게 발전시켰다. 이를 이용하여 이웃 우리나라를 침략할 기회를 호시탐탐 엿보다 왔다. 1876년 병자수호조약을 맺은 것은, 곧 우리나라를 침략하기 위한 첫 공작이었다. 1895년 우리의 왕비를 시해하는 을미왜변이 있어 의병이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으로 우리의 외교권을 박탈하고 통감부를 설치하여 우리나라 통치를 시작하였고, 급기야 1907년에는 헤이그 밀사사건을 이유로 고종황제를 강제퇴위시키고 우리의 군대를 해산하였다. 공은 의분을 이기지 못하여 동지들을 규합하여 사천, 산청, 지리산 일대에서 의병으로 활동했다. 1908년 전반기에 이차봉, 이소봉, 김화숙, 김찬숙, 김우옥, 김응오, 장명언 등 삼가 출신 동지들과 함께 삼가, 사천, 단성, 산청 일대에서 군자금을 모집하는 총책을 맡아 큰 공을 세웠으며, 일본 관공서를 습격하는 등 몇 차례의 격전을 벌였다. 특히 1908년 4월 24일 삼가군 대평면에서 신화 24원, 28일 사천군에서 신화 17원, 엽전 8관을 모집하고, 5월 1일 합천군 모 영수원 집에서 엽전 1관 3백문, 6일 삼가군 문송면에서 엽전 2관을 모집하였다. 또 산청의 일본 순사주재소를 습격하여 소각하고, 무기 등 관급품 일체를 노획하는 등 전과를 크게 올렸다. 이런 활동으로 인해 삼가 순사주재소의 일본 경찰에 1908년 5월 12일 체포되었다. 일본 경찰은 검거하지 못한 의병을 체포하고자 하여 18일 이미 체포된 공과 동지들을 끌고 삼가군 고현면으로 출동하였다. 이때 의병장인 공 등을 구출하려는 의병들이 일본 군경을 습격하여 그 틈에 탈출시키려고 했으나 공은 동지들과 함께 전원 피살되고 말았다. 공의 시신은 찾지 못하여 묘소도 남아 있지 않다. 게다가 1949년 삼가면 사무소가 좌익들에 의해서 불타는 바람에 상세한 신원도 알 수 없고, 족보에도 이름만 올라 잇고 그 밖에는 아무런 행적이 기록되어 있지 않다. 다만 일본의 「폭도에 관한 편책」이라는 문서에 3건의 기록이 있어 독립운동 공적이 증명되어 2004년 광복절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받았다. 공은 세상을 떠날 때 자손이 있었을 것이나, 지금까지 찾지 못하고 있어 안타깝다. 공의 위대한 공적이 인멸되는 것을 안타까워하여, 청주한씨 공사공 종중의 임원진과 여러 종원들과 협의하여 공의 사적비를 세우기로 결정하고 나를 방문하여 비문을 지어줄 것을 요청해 왔다. 내가 그 정성에 감동하여 크게 사양하지 않고 관계 자료를 모아 이렇게 서술하고 끝에 명을 붙인다. 국가민족을 위해 목숨을 바쳐 조국을 지키려고 노력한 공의 위대한 공적에 비해, 생애에 관한 자료가 너무 없는 것은 정말 탄식을 금치 못하게 할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