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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12일에 출옥하였다. 출옥한뒤로는 국가가 독립하기위해서는 교육이 필요하다는 것을 절실히 느끼고서 귀평의 파평윤씨 재실에 귀음의숙을 1921년에 설립하고 교장의 책임을 맡았다. 국어 영어 수학 수신체조등의 과목을 가르쳐 우리의 젊은이들에게 민족정신을 고취시켜 주고 시대현실을 직시하는 안목을 갖추게 하였다. 학교가 번성할때는 학생이 150여명에까지 이르렀으나 1925년에 애국가를 불렀다는 이유로 일제는 학교를 폐쇄시켜버렸다. 일제의 탄압과 감시가 점점 더 심해져오자 선생은 만주로 옮겨가 독립운동을 계속하였다. 이때 아우 욱동 일동과 아들 필우 여우와 조카들도 함께 가족 독립운동에 참가하여 많은 활약을 했다. 그러나가 모친 함안조씨는 봉천서탑에서 별세했고 부인 성산이씨와 장남 필우는 1943년 만주 삼강성 나북현에에서 별세했다. 해방후 선생은 조국으로 돌아와 진주 옥봉동에서 거주하다가 1952년 6.25전쟁중에 별세하였다. 묘소는 진주시 이현동 선산에 있다. 독립유공자가 된뒤 국립묘지 현충원으로 이장하려고 묘를 열어보니 유골은 보이지않고 묘지석만있어 이장을 하지 못했다. 선생은 한평생 조국의 독립을위해 한몸을 돌보지 않고 노력했지만 주변에 그 공적을 전하는 자제들이나 동지가 남아있지않아 훌륭한 자취가 흔적도 없이 사라져 점점 사람들의 관심밖으로 밀려나게 되었다. 근년에와서 경남도의회 수석 전문의원 조찬용씨등이 다년간의 노력을 들여 선생의 독립운동의 공적을 밝혀 마침내 독립유공자로 인정되어 2009년 8월 15일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다. 또 2005년 삼가장터 삼일만세운동기념탑에 그 공훈이 새겨져있다. 그리고 행방을 몰랐던 손자 기표와 증손자 현호 현국도 찾게 되었다. 선생이 독립운동에 헌신한것은 살신성인하고 사생취의하는 선비정신에 기인한것이다. 선비정신에 기인한 것이다. 조선 중기 대학자 남명선생은 옛날 삼가현 사람으로 많은 제자들을 길렀는데, 그 제자들이 壬辰倭亂 때 義兵을 일으켜 나라를 구제했다. 덕촌은 옛날 삼가현에 속한 지역으로 남명이 끼친 경의사상이 짙게 배어 있는 곳이다. 선생은 어려서부터 집안 어른들로부터 가르침을 받고 자라서는 조선 말기의 대학자 后山 許愈先生의 문하에 나아가서 공부하여 氣節을 숭상하는 남명정신을 배웠다. 후산선생은 南冥과 退溪 두 大先生의 학문을 아울러 익히신 분으로 유림에서 이름이 높았다. 선생은 합천에서 세거해온 청주한씨 가문에서 태어났으니, 1888년 1월 26일이었다. 자는 悅卿이다. 淸州韓氏는 高麗 三重大匡 威襄公 諱蘭을 족보상의 시조로 삼는다. 이후 자손이 번성하고 현달한 인물과 학자들이 많이 배출되어 온 나라에 두루 알려진 명문이 되었다. 高麗末 判厚德府事 文敬公 柳巷 諱脩는 名節로 이름이 났다. 그 아들 領議政 西原府院君 文簡公 諱尙敬이 開國功臣으로 朝鮮初期에 이름이 크게 알려졌다. 그 손자 領議政 文靖公 諱 繼禧는 공신으로 西原君에 봉해졌다. 그 손자 遯庵 諱 承利는 副司直을 지내다가 燕山君의 亂政을 만나 벼슬을 버리고 남쪽으로 내려와 晋州에서 숨어 지냈다. 江右地域의 韓氏들은 대부분이 遯庵公의 후손들이다. 그 증손 釣隱 諱夢參은 學德이 있어 王子師傅로 추천되었다. 그 증손 諱範錫은 武科에 급제하여 副摠管 七道兵馬節度使를 지내는 등 능력 있는 將軍으로 이름이 높았다. 그 5대손 諱鎭行은 嘉善大夫 參領을 지냈는데, 선생의 조부다. 대대로 仕宦과 학문이 있는 집안으로 경상우도에 널리 알려져 있다. 부친은 諱翊源인데, 역시 후산선생의 제자이다. 모친 함안조씨는 용하의 따님이다. 선생 뿐만 아니라 집안 사람 가운데 한치문이 이미 1908년 정미의병전쟁 때 일본군과 총격전을 벌이다가 大幷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