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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개월 여 구금되는 동안에 학교에서는 퇴학을 당하였고 집으로 돌아온 공은 사람은 배워야 큰일을 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 사재를 털어 야학당을 열고 배울 기회를 얻지 못한 사람들에게 민족의식과 항일정신을 고취하던 중 일본 경찰의 감시가 심해지자 1925년 만주 대만을 거쳐 일본을 밀항하여 수학 과정 중 대판의 방직공장에 취업 후 조선인 근로자를 상대로 비밀리에 반일 독립정신을 선양하였다. 1930년에 귀향하여 다시 야학을 개설하고 동생분 박기종과 함께 교사 역할을 했으며, 이듬해 3월에는 동지 송기호 장호관 박지원 조삼수 심호배 정성수 등 19명과 조선공산주의자 진주협의회라는 비밀결사대를 조직하고 진주지구 총책과 금산면책을 겸임하여 민족 해방과 조국의 독립을 위해 결사대를 조직 활약하던 중 동년 7월에 일경에 검거되어 일 년여에 걸친 혹독한 고문으로 빈사지경에 이르니 일시 가석되었다. 동지들은 심문과정에 공이 총책임자라는 것을 끝까지 부인한 관계로 공이 결석 재판으로 1년 징역 3년 집행유예의 언도를 받았으나 고문의 여독으로 1940년 12월 29일 향년 36세로 큰 뜻도 펴지 못한 채 서거하셨다. 오호라 공이 가신지 어언 육십여 성상 추모의 정은 면면한데 그 빛나는 투쟁에 관한 기록들이 인몰되어 세상에 현창되지 못함에 뜻있는 인사들이나 자손들의 통한일러니 서자인 우상의 다년간의 추적으로 관련 기사가 게재된 일본 고등법원 검사국 사상월보 3권이 발견되고 이것이 증빙이 되어 부산지방법원 고문서 창고에서 상기한 진주지구 협의회의 농민회 독서회 학생회 사건에 관한 기록이 색출되어 그 전모가 드러나고 이로 인해 1996년 독립유공자로 대통령 표창장과 2001년 국가유공자 증서가 추서되니 그 지사 아버님 그 효자 아들 있다 하겠다. 남도 유지 인사와 금산면 이장단 협의회의 성원으로 애국지사 만촌 밀양 박공 호종 추모비 건립위원회를 조직하고 안판수 위원장과 우상군이 나에게 비문을 청하므로 우상군은 평소에 같은 광복회원으로 우의가 깊은 사이인지라 비문 박덕을 무릅쓰고 감히 이렇게 적는 바이다. 공의 백절불굴의 굳은 지조와 시종여일한 애국충정은 민족의 역사와 더불어 영원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