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page


7page

1909년 서상일 안희제 김동삼 등 청년 중심의 비밀 독립운동 단체인 대동청년당에 가입하여 활동하였으며, 상경하여 보성전문학교를 졸업하고 1911년부터 1917년까지 동교 법률학 교수로 재직하였다. 1915년에는 대구의 안일암에서 윤상태 서상일 등 동지들과 함께 조선국권회복단 중앙총부라는 결사를 조직하여 국권 회복에 신명을 바칠 것을 결의하고 활동하다가 1919년 3·1독립운동이 일어나자 경남 창원 등지에서 시위를 적극 주도하였다. 1919년 3월 해삼위 신한촌에서는 한족회를 근간으로 대한국민의회를 설립하고 손병희를 대통령으로 하는 등 각료를 선출하였는데 그는 산업총장에 선임되기도 하였다. 동년 4월에는 국권회복단에서 모금한 독립운동자금을 가지고 상해로 건너가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하였으며, 그는 법무차장에 임명되었다. 또한 임시의정원 의원에 선출되어 의정원 회의에 참석하였으며 동년 5월에는 법무총장에 임명되었다. 1920년에는 교통총장으로 전임되어 1921년 4월 사임할 때까지 일하였다. 1921년 북경의 군사통일회와 간도의 액목현회의 등에서 의견 차이로 각기 국민대표회의를 계획하게 되자 상해와 북경 사이를 왕래하며 절충한 결과 그는 국민대표회의의 주비위원장에 선임되었으며 1922년 5월에 "과거의 분규와 착잡한 문제를 해결하고 미래의 완전 확실한 방침을 수립하여 독립운동이 통일적 조직적으로 진행할 것"을 선언하는 선언서를 발표하였다. 이와 병행해서 그는 배천택 서동일 등과 북경성 마사묘에서 무언실행을 행동 지침으로 일제 앞잡이를 처단하는 "다물단을 조직하고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하기도 하였다. 1922년 7월에는 국민대표회의 문제로 임시정부가 혼란에 빠지게 되자 이를 해결하기 위하여 안창호 최창식 신익희 차이석 신 숙 등과 함께 시사책진회를 조직하여 이를 수습하려 하였으나 별 효과를 보지 못하였다. 1923년에는 다물단원 서동일을 귀국시켜 경북 일대에서 군자금을 모집하였으며 서동일은 체포되어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다. 1928년에는 북경에서 만주 하얼빈으로 가족과 함께 이주하여 흑룡강에서 사설학원을 운영하였다고 한다. 그후 1930년에 일경에 체포되었다가 수토병으로 귀국하여 고향에서 요양하였다고 한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83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7page

담은 비저 문어지고 지게는 바람마자 뚤어졋네 잔뎡지 비도마에 압산새 왓다간다 아희야 배곱다 말고 글 일거라 1926년 북경에서 유석 선친께서 해외망명 생활중 상해에서 북경으로 활동무대를 옮긴후 가족과 더불어 망국의 서러움과 고난을 격든 시절 그 당시의 심정과 사정을 읊은 시조이다. 여식 기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