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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조국광복을 위하여 풍찬노숙 중국대륙을 주름잡다가 병든 몸으로 돌아와 스스로 목숨을 끊어 일제에 항거하신 독립투사 한 분이 계시니 이 분이 바로 향토 고령이 낳은 수석 남형우 선생이시다. 선생은 일찌기 1874년 7월 17일 이곳 내상동에서 출생하시니 숫종 때 양관대제학을 지낸 아곡 선생의 9세손이요. 순조 때 고령현감을 지낸 석고공의 현손이며, 상실공과 오해사 여사의 차남으로 본관은 선녕이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강직하여 정의감이 투철하였으며, 남을 울리고 웃기는 웅변이 있었다. 40세가 되도록 고향에서 한학을 닦으시다가 1908년 뜻한바 있어 현 고려대학교의 전신인 보성전문학교 법과에 입학하시고 재학중에 안희제 김동삼 윤병호 서상일 박중화 등 동지와 항일무장투쟁단체인 대동청년당을 조직하여 구국운동을 전개하는 한편 1910년 졸업과 동시에 모교의 전임강사로 피임되고 교수로 재직하면서 1915년 윤상태 서상일 이시영 박영모 홍우일 이영국 서병룡 김규 정순영 황병기 등 동지와 조선국권회복중앙총본부를 조직하여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하시고 1919년 3.1운동을 계기로 민족자결원칙에 입각하여 상해로 망명 대한민국임시정부 법무차장을 거쳐 법무총장에 피임되었으며, 1920년에는 교통총장에 피임되는 등 임시정부의 요인으로 활약하는 한편 1921년 신대한동맹단을 조직하여 단주가 되고, 부단주 신채호 동지와 박용만 이동휘 등 40여명의 단원들과 항일독립운동에 헌신하셨으며, 1922년 분열된 독립운동단체들을 결합하기 위하여 국민대표회수비위원회를 구성하고 위원장으로 활약하셨고, 1923년 배천택 원세훈 장건상 김상덕 신성모 등 동지와 함께 활동무대를 북경으로 옮기고 항주에 있는 독립운동 단체와도 연대를 가지는 한편 1925년 배천택 한진산 우청우 서동일 서일보 김세준 등 동지와 입을 다물고 비밀을 사수하며 용기 전진 결단을 행동강령으로 하는 비밀결사 「다물단」을 조직하여 독립운동자금모집과 악질 친일파암살 등 단행하셨으며, 1928년 만주 할빈으로 옮겨 활동하다가 이듬해 흑룡강성으로 옮겨서 교포들의 교육과 독립정신고취에 진력하시던 중 과로와 수토병으로 생명이 위독하게되자 1931년 부득기 고향으로 돌아와 투병생활을 계속하다가 일제의 발악적인 식민지정책과 박해에 분노를 참지 못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어 항거하시니 때는 1943년 3월 13일이었다. 유족으로는 부인 유하지 여사가 있었고, 양자 기백 딸 기옥 사위 최수경 손자 중현이 있다. 오호라! 선생의 일생은 짧았어도 애국정신은 영원한 것이어서 광복된 조국에서는 빛나는 건국포장을 바치고, 이 고장 애국인사들은 선생의 높으신 뜻을 길이 받들고자 이 돌을 바치면서 나에게 글을 청하기에 내또한 추모의 정성으로 대강 그날의 행적을 적고 노래 한 장을 바친다. 가야산 높푸르고 대가천 굽이 친다. 우리님 구국정충은 산고수장일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