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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무하시면서 교육으로써 민족의 자존심을 드놉히고 물욕에 초탈한 성격으로 넓게 규휼하며 초연히 지조를 지키는 의인으로서 명실 사회의 스승이기도 하였다. 때는 바야흐로 일제강압정치의 절정기라 드디어 민족해방과 독립자유를 절규하고 포악한 왜정에 항거하여 삼천리 방방곡곡에 만세소리가 지축을 흔들고 태극기가 물결치는 3.1운동이 일어나게 되니 열혈애국청년은 교단에 머물수 없어 김천개녕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고 대표로 대구만세사건에 참여했으며 개녕에서 연일 만세를 고창하며 선도하다가 일경에 잡혀 가진 악형을 받았으며 그때의 혹독한 고문과 태형으로 말미아마 그 후유에 취욕하는 일이 많았다. 선생은 이에 굴하지 않고 야인에 돌아가 영남지방 여러곳을 전전하며 교회 역무에 갈력하면서 기독교정신을 바탕삼아 항일운동을 계속했으며 상해임시정부 요인 이시영과 연결되어 독립운동자금을 모집 전달할 뿐 아니라 국제회의 호소문 제출의 대표로 참여하였으며 송명옥 장이석 김종수 등 유위한 애국청년들을 만주신흥무관학교에 입교주선하였고 수차에 긍한 군자금송달을 주동하다가 1922년 12월 선생과 더불어 이시영 두산장군 이현수 교회 교역자 유림대표 등 124명의 일제검거에 구속되었고 끝없는 일제의 감시와 압제에도 굴함이 없이 군자금송달 등 독립운동에 헌신하였다. 광복후는 연소일우에 거처하면서 조국의 앞날을 걱정하며 오직 기도일념으로 지나시다가 1985년 1월 3일 하늘의 부르심에 세연을 다하니 향년 89세였다. 비극의 역사속에서 겪어온 그 많은 고초와 파란을 추념할세 이 한돌에 그 높은 이념과 크나큰 사랑과 하늘을 찌르는 기백들을 다 남길 수 없음이 한이로다. 이제 선생의 애국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