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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세에 대구에서 애국단을 결성하여 동지를 규합하고 선생과 박상진은 다음해 가을 만주에서 무기와 탄약을 구득보관하고 1915년 1월 대구 안일암에서 서상일 윤상태 박상진 이시영 남형우 홍우일 안곽 박영모 외 30여 동지가 모여 조선국권회복단 조직하고 국내요처에 태궁 백산상회 등 사업체를 두어 경영케한 이익금과 최준명 정운일 최병규 등에 권총을 주어 서창규 등 대구 부호들에게 끈질긴 활동으로 받아낸 거금을 서상일에 전달하여 만주의 독립군과 신흥무관학교 군자금으로 밀송했으며 그해 7월 대구 달성공원에서 풍기에서 모인 생존 의병장을 비롯 채기중 장두환 황상옥 김진만 등 이백여명이 합세하여 대한광복회를 결성하고 「원수 일제를 몰아내고 조국이 광복될 때까지 절대불변 일심육력한다.」는 서맹 아래 적극활동을 하던 중 1916년 9월 부호 서우순가에 침입한 단원 9명과 더불어 선생과 박상진 등이 일경에 체포된 바 7개월동안의 지독한 고문에도 조직의 비밀을 끝내 지켰으나 선생도 6월 징역형을 받고 복역 출감 후 곧 채기중 김한종에게 권총을 주어 악질관리와 변절자의 처단을 주도하는 등 끊임없는 활동을 계속하다가 밀고로 인해 광복회활동과 무기공여의 사실이 탄로되어 1918년 2월 다시 구속되고 지독한 고문과 오랜 옥고를 치루었으며 그 후도 검속이 지속되었으나 명석한 처변으로 일경을 괴롭히다가 1919년 10월 만주로 뛰어 곧 대한청연합회에 가입하고 1920년 국내활동의 소임을 맡고 잠입하여 익년 5월에는 해인사에서 「현대와 청년의 사상」이란 제하의 대강연회를 갖는 등 순회강연으로 독립사상을 고취하였으며 다시 해외로 망명하여 그칠줄 모르는 활동을 계속하였다. 1926년에 귀국 향리에서 43세의 때 늦은 결혼을 하여 가통을 이었으나 역려의 풍운을 탄 선생인지라 다시 상경하여 지하운동을 하시다가 해방을 맞이하고 그 감격을 채 누리지 못하시고 1950년 3월 29일 67세를 일기로 선화하셨으며 국립묘지 애국지사묘역에 안장되었다. 선생이야말로 그 고매한 인격과 깊은 학식 등 한없는 가능성을 모두 버리시고 일생을 오직 한줄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