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page


64page

나 지주들이 수레를 끌고가는 농민들에게 길을 양보하지 않을 때에는 말다리를 부러뜨려 질타하는 등 신분사상 철폐에도 앞장서 왔다. 훗날 개곡동마을앞 길이 말뚝이라 불리게 된것은 권세가들에 대한 응징이 주로 이곳에서 이루어진데 연유 하였다고 한다. 1910년 8월 22일 일제가 한반도를 강제로 합병하고 총칼로 무장한 헌병과 경찰을 주둔시켜 우리 동포들을 무자비하게 탄압하자 애국충절에 불타던 지사께서는 김옥진 권두경 이암회 권도익 김필수 등 10여명의 동지를 규합하여 비밀리에 결사대를 조직하고 일본경찰이 주둔하고 있는 군내 각 면사무소를 수차에 걸쳐 기습공격을 하는등 일제의 만행에 앞장서 저항하여 한민족의 기개를 드높혔으며 일제 강점기에 우리 민족사의 쾌거인 3.1만세운동이 전국 방방곡곡에서 일어나자 김병우 김원진 유동붕 이상동 임찬일 강대극 문우석 박진성 동지들과 태극기와 전단을 만들어 군내 각 리.동에 배포하고 3월 18일을 기하여 군민들을 동문통은 견항천 예안통은 목성산 영주,풍천통은 서당골산 대구통은 영호루에 집결토록 하여 1시에 만세시위를 전개키로 결의하였다. 지사께서는 대구통의 남선, 남후, 일식 등 3개면의 조직책임을 맡아 수백명의 시위대를 이끌고 앞장서서 독립만세 시위를 전개하고 3월 23일에는 영호루에 500여명을 재집결시켜 경찰서를 향하여 2차시위를 주도 하시다가 일제관헌들이 미친듯이 휘두르는 총칼에 머리와 배 등을 무참하게 찔려 현장에서 쓰러진후 동지들에 의하여 간신히 구출되어 응급치료를 받았으나 애석하게도 조국광복의 한을 풀지 못한체 다음날인 3월 24일 44세를 일기로 거룩한 목숨을 거두었으니 이어찌 통분한 일이 아니리요. 그러나 일제의 강압통치 아래서 자손들에게 미칠화를 염려하여 사실을 숨기기에 급급한 나머지 기록이나 증거물이 보전되지 못하여 묻혀진 사실로 전해 오다가 1995년 8월 15일 광복 50주년을 맞아 정부로부터 지사의 숭고한 멸사봉공의 항일독립운동업적을 인정받아 건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