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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의 휘는 상부요 자는 우성이며 성은 서씨로 대구가 관향이니 조선 명종조 퇴계 이황 선생의 문인으로 일찍 구도에 뜻을 두고 안동 소호헌에서 성리학에 침잠하여 약관의 나이에 문장학업으로 사우들의 추중을 받으셨던 증 영의정 휘 해?함재공의 아드님으로 임진왜란때 관북지방에서 의병을 모아 북평사 정문부공과 함께 많은 군공을 세운 뒤 순무어사로 경상도를 순안하고 삼도주사를 시찰하며 조당에 전수지대을 지주하여 국가안위에 혁혁한 공을 세우신 판중추부사 휘 서 호약봉 시호 충숙공의 10대손이다. 고조는 척형장군 검지중추부사 휘 근수이시고 증조는 문석우제후사진원사진을 역임하신 휘 유기이시며 조는 통덕랑 휘 경보이시고 고의 휘는 일정이시다. 공은 경자 1840년 10월 18일 안동의소호제에서 출생하시니 천자가 경오하여 훌륭한 학문과 근실한 행실로 인리에까지 널리 알려졌으며 중년에는 의성군 옥산면 봉산에 우거하시며 후학들을 훈도하셨다. 국운이 비한하여 을미 1895년 8월에 왜구가 범궐하여 국모를 시해하는 참변이 일어나니 전국민이 통분하였고 고종의 밀지를 받은 학사 이용호씨가 명망있는 선비들을 찾아 의거를 권함에 뜻있는 선비들이 각처에서 의병활동을 전개하였다. 공께서도 병신 1896년 정월의 예비모임 후 동년 2월 1일 의성향회에서 수임으로 천거된 심우 김상종 공 등과 함께 즉시 의병활동을 시작하였다. 의성의진이 의병을 모집한지 한 달도 안된 동년 2월 19일에 적병이 온다는 경보를 듣고 의성읍 서남쪽 구성산에 포진하여 임전태세를 갖추고 다음날 접전하여 적 수십인을 사살하고 대승하니 공의 족제인 호좌의 소모장 서상렬 공은 이를 치하하는 격문을 보내왔다. 패한 적은 읍중에 불을 질러 아군을 어지럽게 하였으나 아군은 전열을 재정비한 후 2월 29일에 황산으로 이진하였으며 3월 4일 적대병이 온다는 소식을 듣고 용담사로 이진하여 결전에 대비하였다. 3월 9일 다시 황산으로 돌아와 진중을 갖춘 후 정세를 살피던 중 3월 28일 적이 몰려온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적을 유인하여 공격하고자 전후진으로 나누어 전진은 고모곡으로 이동하고 후진은 미처 이르지 못한 사이에 많은 비가 내리는 가운데 적의 기습을 받아 순식간에 포구에 물이 흘러들어 화약이 진흙처럼 되어버리는 의병의 구식기로는 왜병의 신무기의 성능을 당할 수 없어서 혈전 끝에 아군 27명이 전사하는 참패를 당할때 공께서도 권철연 김수재 김수석제 공 등과 같이 장렬히 순국하시니 때는 병신 1896년 3월 29일이다. 공께서 순국하신 후 백여년이 지난 정해 2007년 8월 15일 독립유공자로서 대한민국정부로부터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이에 후세의 귀감이 될 수 있도록 이 기적비를 세워 공의 의덕과 방명을 길이 전하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