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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5년 영선사주사(營繕司 主事)로 있을 때 일제가「을미사변」으로 명성황후를 시해하자 여러차례 복수토역소(復讐討逆疏)를 올렸으며, 고종의 밀령을 받아 명성황후 시해의 죄상을 조사 보고하려다가 실패했고, 정부내의 친일분자를 숙청하려다가 역시 실패했다. 1903년 5월에는 청국 동순태의 상표와 일본제일은행권의 국내유통을 반대하는 민중운동을 전개하였다. 1905년 11월 일제가 무력으로 위협하여「을사조약」을 강제 체결하고 국권을 침탈하자「을사조약」의 파기와 을사5적의 처형을 주장하는 격문을 전국에 살포하였다. 1906년에는 향리에서 동아개진교육회를 창립하고 국권회복을 위한 애국계몽운동에 진력하였다. 1907년에는 서울에서 동우회를 창립하여 제2대 회장이 되어 매국단체 일진회를 성토하였다. 헤이그밀사사건을 구실로 일제가 고종을 강제 양위시키고 일본인 차관통치를 시작하려 하자 동우회의 결사대를 조직하여 대한자강회와 연합해서 격렬한 반대시위운동을 전개하고 을사5적 처단과 이완용가에 방화를 제의하여 이를 소각하는 등 구국운동을 전개하였다. 이 운동으로 3년간 전라남도 지도에 유배당하였다. 일제가 1910년 8월 한국을 병탄하자 1913년 9월에 독립의군부에 가입하였는데, 독립의군부는 의병무장투쟁을 계승하는 독립군 단체로서 중앙에는 중앙순무총장, 각 도에는 도순무총장, 각 군에는 군수, 면에는 향장을 배치하고 일제식민지 통치를 거부하면서 비밀히 독립정치를 하고 한국인이 일제의 식민지통치에 굴복하고 있지 않음을 세계에 알리어 국권회복의 국제여론을 환기시키려고 노력하던 단체로서, 윤이병 등은 1914년 4월에 일제에게 체포되었다. 1919년 3 .1운동 때에는 서울 적선동에서 독립만세운동에 참가했으며, 3월 상순에 한남주 등과 13도 대표의 국민대회의 결의를 지지하고 한성정부안(조선민국수립)에 의거한 임시정부의 수립을 요구하며 선전하다가 일제에 체포되어 징역 10개월의 언도를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독립운동에 끼친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8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출처 : 보훈처 공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