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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은 구국의 뜻을 품고 무과에 올랐으며 명성황후가 시해되자 역당소탕을 계획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이듬해 42 세 때에 도리어 무고죄로 고군산도에 귀양갔다가 다시 풀려와 한성재판소 수반판사에 임명되어 모든 판결을 엄정하게 하므로 탐관호족도 숨을 죽였고 정의로서 국맥을 바로잡아야 할 것을 애타게 외쳤으며 경부철도 부설권이 일본에 이양되자 러시아는 경의선 철도 부설권을 요구하므로 선생은 통분함을 참지 못하고 일본과 러시아의 요구를 강력히 배격할 것과 간교한 매국도배를 무찌를 것과 재정, 양곡의 정책 등을 상소했었다. 1905 년 51세 때, 을사조약이 강제로 채결되자 국가의 위급을 상소하는 격문을 지어 전국에 살포했으며, 이듬해에 농상공부 형판과 평안도 관찰사에 연배되었으나 이를 사양하고 향리에 돌아와 민중을 교도하려고 동아개진교육회를 창립하고 풍속 선도에 애쓰시다가 1907 년 봄에 다시 서울로 올라와 동우회를 창립하니 황실존중과 동양평화와 청년교육이 삼대강령이었고 수개월이 채 못되어 회원이 수천명에 달했다. 헤아 밀사사건에 이어 고종양위와 군대해산으로 국운이 어두워지자 동우회원들이 앞에 나서 일경과 싸운 끝에 선생은 회장으로서 투옥되었다가 이듬해 54 세 정월 내란죄라는 평리원의 판결로 지도에 유배되었더니 2년이 지나 1910 년 망국후에 풀려나서도 불굴하는 독립정신의 고취로서 거듭거듭 영어의 몸이 되었고 다시 5~6 년후 광복의 뜻을 품고 북만주로 향하던 도중 북청에서 선조 문숙공의 현몽으로 결심을 굳혔으나 불행하게도 일본경찰에 체포돼 경성으로 옮겨와 갇혔다가 이른바 회유정책으로 1개월 뒤에 방면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