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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창신씨의 역사 거창신씨의 시조는 신수이시다. 공은 중국 송나라에서 1068년 고려에 사신의 일원으로 오셨다가 문종의 권유로 귀화하여 고려인이 되셨다. 고려사에 의하면 공은 학식이 매우 높고 의술에 정통하였으며 관직이 사도에 이룬 후 졸하시니 국왕이 시호를 공헌으로 내리시어 이후 거창신씨는 모두 공헌공의 자손이라 이르게 되었다. 2세도 안지께서 병부상서가 되시면서 가문은 고려의 귀족으로 자리를 굳히게 되었고 그 후 7세조 집평께서 신호위 대장군 동북면 병마사가 되시어 몽고군의 침략에 항전하다 전사하셨는데, 얼마 후 조정의 친원파에 의해 장악되자 신문은 반원파로 지목되니 8세조 성께서 거창으로 낙향하시어 본관을 거창으로 삼게 되었다. 우리 가문은 시조부터 독자로 이어오다가 13세조 이충께서 참판공 기, 서령공 언, 양강공 전 세 아드님을 두시니 그 삼형제분이 파조가 되시고 이후 자손이 번창하였다. 조선이 개국된 후 많은 선조께서 등과하여 신문은 다시 명문사족의 가문으로 크게 융성하였는데 15세조 승선께서 세종대왕의 손녀사위가 되시었을 뿐 아니라 벼슬이 영의정에 이르고 따님은 연산군비에 오르시고 아드님 수근은 좌의정이 되시었으며 훗날 손녀가 중종비(단경왕후)에 오르시면서 유명한 "치마바위" 전설을 남기시기도 하였다. 이 묘원은 거창신씨 재문공의 후손들의 유택이며 5대손 공남공 이하 후손들이 길일을 택하여 양지바른 이 곳에 모시게 되었습니다. 항상 선조님들의 유지를 받들어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자매간에 우애를 돈독하게 하고 친족간에 협심하여 가문이 대대손손 번창하기를 바라며 이 비를 세웁니다. 30세 공남 31세 상훈 상율 근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