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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훈록 1919년 3월 21일부터 24일까지 신좌면 조천리(朝天里) 일대의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였다. 이곳의 독립만세운동은 이곳의 유지 김시학(金時學)의 아들로서 서울 휘문학교(徽文學校)에 재학중이던 김장환(金章煥)이, 서울에서 전개된 독립선언식과 독립만세운동에 참가하고 3월 15일 귀향하여 제주도내에서 이름높은 유학자이며 지사인 백부 김시우(金時宇)에게 서울의 독립만세시위 상황을 소상하게 알림으로써 독립만세운동의 기운이 싹트기 시작하였다. 그는 김시범(金時範)·고재륜(高載崙)·김영배(金營培)·김연배(金年培)·황진식(黃鎭式)·김찬용(金燦容)·백응선(白應善)·김운배(金云培)·박두규(朴斗奎)·이문천(李文千)·윤계진(尹桂珍)·김경희(金慶熙)·김필원(金弼遠) 등의 동지들과 함께 조천리에서 약간 떨어진 『미밑동산』에 들어가 사생을 같이하기로 맹세하고, 산 이름도 『만세동산』이라고 고쳐 부르기로 하며 독립만운동을 계획하였다. 이에 3월 21일 거사하기로 결정하고, 신촌(新村) 함덕리(咸德里) 등의 인근 부락과 서당 학생들에게도 독립만세시위 계획을 알려주며 다 함께 참가할 것을 권유하였다. 거사일인 3월 21일 오후 3시경, 그는 6백여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만세동산』에 모여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독립만세를 외치며 큰길로 시위행진을 하였는데, 이때 긴급출동한 수십명의 일본 무장병에 의해 제지당하고, 주동자 12명이 체포되었다. 그러나 그는 이튿날 다시 시위군중과 함께 구속된 동지들의 석방을 요구하며 독립만세를 외치면서 저녁 무렵때까지 행진시위를 계속하였다. 이어 3월 24일 조천리 장날을 맞이하여 다시 수많은 시위군중을 모이게 하여 독립만세를 외치며 행진하다가 일제의 무력에 의하여 체포되었다. 결국 이해 5월 29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1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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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천 3.1만세운동을 주도하신 14인 동지 김시은의 생가터 2010.10 조천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