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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에는 신익희 백남훈 장덕수 등과 더불어 조선유학생 학우회를 조직하여 활동하셨고 뒤에 회장으로 피선되어서는 학회지 학지광을 발간하셨으며 1919년 3.1운동에 앞서 일본에서 일어났던 2.8독립선언에도 참가하시었다. 1920년 동아일보가 창간되자 논설위원으로 참여하셨으며 1922년에는 신생활을 창간하여 주필로 활동하셨는데 이때 필화사건으로 징역 2년형을 선고받아 함흥형무소에서 복역하시다가 병으로 형집행정지 처분을 받고 풀려나시었다. 열사는 이밖에 조선청년회연맹합회 노동공제회 신간회 등에도 참여 활동하셨으며 그 뒤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독립운동에 진력하시다가 일경에 피검되어 반신불수가 되도록 혹독한 고문을 받고서 다시 대판형무소에서 모진 옥고를 치루셨다. 석방되신 후에도 열사는 고문후유증으로 앓으시다가 1943년 2월 11일 세화리에서 그렇게도 원하시던 조국광복도 못본채 향년 52세를 일기로 그 파란만장한 생을 마감하셨다. 열사는 슬하에 갑환 성환 순혜 수원 순실를 두셨으며 자부 ··· 중략 ··· 열사의 일생은 일찍이 고순흠 동후표와 더불어 조국 광복을 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