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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덕리 공동묘지에 추모비를 세운 것은 이 곳에 김재동 선생의 묘가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찾아보았지만 찾을 수 없었다. 3년 후 광복회 제주지부에서 묘소도 없고 후손도 없다는 것을 확인하였다 1931년 1월 고향인 북제주군 신좌면 함덕리에서 일본 동경에 유학 중 사망하여 유해가 운구되어 온 향리 출신 독립운동가 한영섭의 장례를 김두성 등과 함께 동지장으로 치르면서, 「그대는 죽었지만 그대의 주의 정신은 동지인 우리들에게 계승되어 분투할 것이니 고이고이 진좌하라」라고 쓴 조기 40여 개를 만들어 사용하고 혁명가를 고창하였다. 이와 아울러 추모비를 만들어 동리 공동 샘터 부근에 세웠는데, 그 앞면에는 「동지적광(同志赤光) 한영섭」, 뒷면에는 「차디찬 백색 밑에 눌리인 무리들아 고함쳐 싸우다 피뿌린 동지였다」라는 문구를 새겼다. 이에 일경이 비석의 문구가 불온하여 안녕질서를 방해하였다는 이유로 비석을 뽑아 내어 압류하고 그와 5명의 동지는 피체되었다. 그 후 1931년 8월 5일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을 받고 공소하여 대구형무소에서 재판 대기 중 옥사 순국하였다. 대구복심법원의 이른바 공소기각 결정문은 그의 사망일자를 1932년 3월 14일로 기록하였으나, 다른 동지 5명에 대한 항소심 판결은 이미 1931년 12월 8일에 있었고 그 판결문에는 그의 이름도 관련사실도 적기(摘記)되어 있지 않다. 이로써 보면, 그의 실제 사망 일자는 1931년 8월 5일 이후 12월 8일 이전의 어느 날인데 일제 법원이 그의 옥중 사망 사실을 은폐하려다 뒤늦게야 공표한 것으로 추측된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3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출처 : 보훈처 공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