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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뚝우뚝한 괴석들이 웅장하게 늘어서 있는데 모두가 부처의 형태였으며 백이나 천 단위로는 헤아릴 수가 없었다. 이는 바로 천불암(千佛巖) 또는 오백장군(五百將軍)이라고도 불리는 곳으로 산남(山南)에 비교해 보면 이곳이 더욱 기이하고 웅장하였다. 그리고 산밑 길가에는 얕은 냇물이 바다로 흘러 들어가고 있었는데 다만 길가에 있었기 때문에 매우 얕게 드러나 있었다. 풀밭에 앉아서 얼마쯤 쉬다가 이윽고 출발하여 20리를 걸어 서동(西洞)의 입구를 나오니 영졸(營卒)들이 말을 끌고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인가에 들어가서 밥을 지어 요기를 하고 날이 저물어서야 성으로 돌아왔다. 대개 이 산은 백두산(白頭山)을 근원으로 하여 남으로 4천 리를 달려 영암(靈巖)의 월출산(月出山)이 되고 또 남으로 달려 해남(海南)의 달마산(達摩山)이 되었으며, 달마산은 또 바다로 5백 리를 건너 추자도(楸子島)가 되었고 다시 5백 리를 건너서 이 산이 된 것이다. 이 산은 서쪽으로 대정현(大靜縣)에서 일어나 동으로 정의현(旌義縣)에서 그치고 중간이 솟아 절정(絶頂)이 되었는데, 동서의 길이가 2백 리이고 남북의 거리가 1백 리를 넘는다. 어떤 이는 산이 지극히 높아 하늘의 은하수를 잡아당길 만해서 한라산이라 이른다고 하고 어떤 이는 이 산은 성품이 욕심이 많아서 그해 농사의 풍년과 흉년을 관장(官長)의 청탁(淸濁)을 살펴보면 알 수 있으며, 외래의 선박이 여기에 정박하면 모두 패하여 돌아가므로 탐산(眈山)이라 이른다고 하며, 또 어떤 이는 이 산의 형국이 동쪽은 말, 남쪽은 부처, 서쪽은 곡식, 북쪽은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다고 하는데 모두 근거 없는 말들이다. 그중에서 오직 형국설(形局說)만을 가지고 비슷한 점을 찾아본다면, 산세가 구부러졌다가 펴지고 높았다가 낮아지는 것이 마치 달리는 듯한 것은 말과 비슷하고, 깎아지른 바위가 층층이 쌓인 절벽이 나란히 늘어서서 두손을 부여잡고 예를 표하는 모습은 부처와 비슷하다. 평평하고 툭 터진 곳에 산만하게 활짝 핀 듯한 것은 곡식과 비슷하고, 북을 향해 껴안은 듯한 산세가 곱고 수려함은 사람과 비슷하다. 그러므로 말은 동쪽에서 생산되고 불당은 남쪽에 모였으며, 곡식은 서쪽이 잘되고 인걸은 북쪽에 많을 뿐더러 나라에 대한 충성심도 각별하다는 것이다. 이 섬은 협소한 외딴섬이지만 대해(大海)의 지주(砥柱)이며, 3천 리 우리나라의 수구(水口)며 한문(捍門)이므로 외적들이 감히 엿보지를 못한다. 그리고 산과 바다에서 생산되는 진귀한 음식 중에 임금에게 진공(進供)하는 것이 여기에서 많이 나온다. 공경대부와 백성들이 일상생활에 소요되는 물건과 경내 6, 7만 호가 경작하고 채굴하는 것도 이곳에서 자급자족이 된다. 그 이택(利澤)과 공리(功利)가 백성과 나라에 미치는 것이, 금강산이나 지리산(智異山)처럼 사람에게 관광을 제공하는 산들과 함께 놓고서 말할 수 있겠는가. 다만 이 산은 궁벽하게 바다 가운데 있어서 청고(淸高)하고 기온도 많이 차므로, 지기가 견고하고 근골이 강한 자가 아니면 결코 올라갈 수가 없다. 그리하여 산을 올라간 사람이 수백 년 동안에 관장(官長) 몇 사람에 불과했을 뿐이어서 옛날 현인들이 거필(巨筆)로는 한번도 그 진면목이 발휘된 적이 없다. 그런 까닭에 세상의 호사자들이 신산(神山)이라는 허무하고 황당한 말로 어지럽힐 뿐이고 다른 면은 조금도 소개되지 않았으니, 이것이 어찌 이 산이 지니고 있는 본연의 모습이겠는가. 우선 이 말을 써서, 구경을 가고 싶은데도 못가는 자들에게 고하는 것이다. -- 을해년(1875, 고종12) 5월에 최익현 찬겸(崔益鉉贊謙)은 적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