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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언덕으로 올라와 동쪽으로 10리쯤 가니 죽성(竹城)이라는 마을이 나왔는데 꽤 즐비한 인가가 대나무에 둘러싸여 있었다. 큰 집 한 채를 얻어 숙소를 정하니 날이 저물었다. 하늘이 캄캄하고 바람이 고요한데 비가 올 기미가 있어 잠을 이루지 못하고 밤을 지새웠다. 새벽에 일어나 종자에게 날씨를 살펴보라고 했더니, 어제 초저녁보다 오히려 심한 편이라는 대답이었다. 그리고 바로 돌아갔다가 후일에 다시 오는 것이 좋겠다고 말하는 자가 열에 칠팔은 되었다. 나는 억지로 한 잔의 홍조(紅潮 술인 듯함)를 마시고는 드디어 여러 사람의 의사를 어기고 말을 채찍질하여 앞으로 나아가니, 돌길이 꽤 험하고도 좁았다. 5리쯤 가니 큰 언덕이 있었는데 이름이 중산(中山)으로, 대개 관원들이 산을 오를 적에 말에서 내려 가마를 갈아타는 곳이었다. 여기에 이르니 갑자기 검은 구름이 걷히고 햇빛이 새어 나와 바다의 경치와 산 모양이 차례로 드러나기에 말을 이성(二成)을 시켜 돌려보냈다. 가벼운 옷차림으로 짚신에 지팡이를 짚고서 올라가는데, 주인 윤규환(尹奎煥)은 다리가 아파서 돌아가기를 청했고 나머지는 모두 일렬로 내 뒤를 따랐다. 한줄기 작은 길이 나무꾼과 사냥꾼들의 내왕으로 조금의 형태는 있었지만, 갈수록 험준하고 좁아서 더욱 위태로웠다. 구불구불 돌아서 20리쯤 가니 짙은 안개가 모두 걷히고 날씨가 활짝 개었다. 그러자 일행 중에 당초에 가지 말자고 하던 자들이 날씨가 좋다고 하므로 나는, "이 산을 중도에서 가고 가지 않는 것이 모두 이들의 농간에서 나왔으니 어찌 조용히 삼가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여기서 조금 앞으로 나아가니 계곡의 물이 바위 밑에서 쏟아져 나와 굽이굽이 아래로 흘러갔다. 평평한 돌 위에 잠시 앉아 갈증을 푼 뒤에 계곡의 물을 따라 서쪽으로 갔다. 돌비탈길을 몇 계단 넘고 또 돌아서 남쪽으로 가니, 고목을 덮은 푸른 등(藤)나무 덩굴과 어지럽게 우거진 숲이 하늘을 가리고 길을 막아서 앞으로 갈 수가 없었다. 이런 데를 10여 리쯤 가다가 우연히 가느다란 갈대가 숲을 이루고 있는 것을 보았는데 아름다운 기운이 사람을 엄습해 왔으며 또 앞도 확 트여서 바라볼 만하였다. 다시 서쪽으로 향하여 1리쯤 가니 우뚝 솟은 석벽이 대(臺)처럼 서 있는데, 뾰족하게 솟은 것이 수천 길은 되어 보였다. 이는 삼한(三韓) 시대의 봉수(烽燧) 터라고 이르지만 근거될 만한 것이 없고 또 날이 저물까 염려되어 가 보지 못하였다. 또 몇 보를 나아가서 가느다란 계곡의 물줄기를 하나 발견했다. 위에서 흘러내린 물의 흔적을 따라 위로 올라가니 얼음과 눈이 특출나게 빛나고 여러 잡목들이 위와 옆으로 뒤덮여 있어 머리를 숙이고 기어가느라고 몸의 위험이나 지대가 높은 것을 알지 못하였는데, 이렇게 모두 6, 7리를 나아갔다. 여기에 이르니 비로소 상봉(上峯)이 보이는데 흙과 돌이 서로 섞이고 평평하거나 비탈지지도 않으며 원만하고 풍후한 봉우리가 가까이 이마 위에 있었다. 봉우리에 초목이 나지 않았고 오직 푸른 이끼와 담쟁이 넝쿨만이 돌의 표면을 덮고 있어서 앉아 휴식을 취할 만하였다. 높고 밝은 전망이 확 넓게 트여서 해와 달을 옆에 끼고 비바람을 어거할 만할 뿐 아니라, 의연히 진세의 세상을 잊고 홍진에서 벗어난 뜻을 간직하고 있었다. 얼마 후 검은 안개가 컴컴하게 몰려오더니 서쪽에서 동쪽으로 산등성이를 휘감았다. 나는 괴이하게 여겼지만, 이곳에까지 와서 한라산의 진면목을 보지 못한다면 이는 바로 구인(九仞)의 공이 한 삼태기에서 무너지는 꼴이 되므로, 섬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마음을 굳게 먹고 곧장 수백 보를 전진해 가서 북쪽 가의 오목한 곳에 당도하여 상봉(上峯)을 바라보았다. 여기에 이르러서 갑자기 중앙이 움푹 팬 구덩이를 이루었는데 이것이 바로 백록담(白鹿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