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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창보 선생님은 일제 식민지 치하 제주도가 낳은 조국 독립투사이시며 항일 혁명가이시다. 선생께서는 천구백이년 제주도 제주읍 용담동에서 고고의 소리를 지르며 탄생하셨고 나이 일곱살 되던 해 당시 제주도의 탁월한 한학자이신 김석익 선생 문하에서 사서삼경을 통독하시고 이로 인하여 선생의 인격과 사상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받으셨으며 천구백십칠년 당시 「러시아」에서 일어난 혁명을 현지에서 목격하고 귀향한 홍양명 선생으로부터 혁명의 이론적 전수를 받으시고 천구백이십오년 조선공산당에 입당 제주도 의당세포 「야체이카」책임자로 활동하시면서 청소년에 대한 교양과 민족의식을 고취시켜 조직을 확대 강화하면서 낫 놓고 기억자도 모르는 해녀들에게 문맹퇴치운동을 전개하여 나라 잃은 식민지 노예임을 각성시켜 해녀 조직을 전도적으로 확대 강화하여 천구백삼십일년 십일월에 무지렁이로만 알았던 제주도 해녀들이 권익항쟁을 일으켰다. 이에 경악한 일제는 제주도의 전경찰에 동원령을 내려 전도적으로 검거 선풍을 일으켜 많은 해녀들과 청장년들이 검속되었다. 선생은 해녀항쟁의 주모자로 지목되어 당시 제주도 경찰의 유치장은 한계가 있어 검거된 인원을 수용할 수 없는 조건 때문에 주모자인 선생을 다른 피의자들과 같이 수용할 수 없어 목욕탕을 임시방편으로 개조하여 그곳에 선생을 수감하였다. 감시 간수가 피곤하여 졸고 있는 틈을 노려 선생은 탈옥을 시도한 끝에 성공하여 당시 제주도와 일본을 왕래하던 화객선 복목환 선장 강병희의 동지적 지원을 받아 적지인 일본으로 탈출하는데 성공 동경에 잠입한 선생은 동지들과 같이 반제 식민지 해방운동과 노동운동에 투쟁하다 제주도 탈출 십여년만에 일경에 체포되어 당시로서는 중형에 해당되는 칠년형을 선고받고 대전 감옥에서 복역 중 일제는 전쟁수행에 모든 사상범을 전향시켜 침략 전쟁의 정당성을 선전하는 선무대로 이용하던 시기 선생에게도 예외없이 전향을 강요하였다. 선생께서는 전향을 단호하게 거부해 그로 인한 일제의 가혹한 탄압과 인간 이하의 대우 때문에 선생의 건강은 극도로 악화되어 천구백사십오년 일월 삼일 사십삼세를 일기로 그토록 갈망하던 조국광복을 못보신 채 제주도가 낳은 조국의 자주적 독립투사이시며 항일혁명가이신 선생은 애석하게 파란만장한 한생을 마감하셨다. 선생께서 생전에 이룩하시려던 고귀한 정신을 뜻있는 후배들이 그 뜻을 받들어 역사적으로 남기고저 여기에 추모비를 건립합니다. 선생님의 추모비 건립에 물심양면으로 헌신적 지원을 하신 실제이신 강창거 선생과 부인 김명선 여사께 깊은 사의를 드립니다. 이천이년 구월좋은날 강창보 선생 추모 기념비 건립추진위원 일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