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page


128page

의병행장(義兵行狀) 1908년 고사훈(高仕訓 일명 承天(승천), 景志(경지)), 김석윤(金錫允 일명 석명(錫命), 勤受(근수)) 등에 의해 은밀히 추진된 제주의병은 1909년 2월 25일(음 2월 6일) 광양동 조병생(趙丙生)의 집에서 궐기하였다. 고사훈과 이중심(李中心)이 의병장에 추대되었으며, 거사일은 1909년 3월 3일(음 2월 12일)로 정해졌다. 이날 의병 창의자들은 '왜적을 격퇴하고 국권회복을 달성하자'는 내용의 격문과 삼읍(三邑) 이장(里長)에게 구체적인 행동지침과 '이에 응하지 않는 이장은 3족을 멸할 것'이라는 내용도 담은 통문(通文)을 화북에서 시작하여 동쪽으로 제주를 일주하며 전달하였다. 의병장 고사훈은 김만석(金萬石) 등과 대정군 영락리·신평리를 시발로 의병규합에 돌입했고, 이중심은 김석윤 등과 제주 중면(中面, 현 제주시) 중심으로 의병을 규합해 합세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의병을 규합하여 관덕적으로 향하던 고사훈·김만석이 3월 1일 광청리(현 안덕면 동광리)에서 일본 경찰에 체포되고, 격문과 통문도 명월리에서 경찰에 압수되면서 제주의병은 모병단계에서 좌절되고 말았다. 일본 경찰은 의병운동이 파급을 우려하여 끝까지 항거하는 고사훈·김만석을 1909년 3월 4일 총살시켰다. 그리고 김석윤은 1심에서 10년 유배형을 받았으나, 지방유지들의 구명운동에 힘입어 2심(1909.7.22)에서 무죄 석방되었다. 이중심·노상옥(盧尙玉)·조병생·양만평(梁萬平)·양남석(梁南錫)은 도외로 탈출하였으며, 한영근(韓永根)·김재돌(金在乭)은 체포되었으나 무죄로 풀려났다. 한편 의병항쟁의 격문을 받은 구우면 두모리장 김재형(金栽瀅)은 출병에 대비하였다 체포돼 3년 유배형을 선고받았고, 신좌면 대흘리장 부우기(夫祐基)는 경찰에 연행되어 온갖 고초를 당하였으매 창의자들과 더불어 이들의 뜻도 길이 전하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