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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고 가는 사람들이 눈 여겨 보았고 소문은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뒤늦게 알게 된 일본경찰 100여명과 경비정 7~8척이 몰려와 경적과 호각을 불며 밤낮 사흘 온 동네를 뒤져도 돌에 글을 새긴 사람을 잡지 못하자 주민들을 모아 놓고 마을마다 불을 지르겠다고 협박하고 다녔다. 주열사는 마을에 피해가 주어서는 안된다는 생각에 순사부장 어디있오 내가 했소 하면서 늠름하게 나타났다. 쥐새끼 같은 조선 놈의 새끼 누구한테 들었어, 누가 시켰어? 다그치고 얻어맞고 물고문에 전기고문 거꾸로 매달려도 하느님이 남방과 중국 인도지나에서 일본이 지고 있는 광경과 우리나라의 미래를 나에게 확실히 보여주었다. 나는 꿈에 본대로 돌에 새겼을 뿐이라고 시종일관 굽히지 않았다. 밖에서도 일본경찰들은 동조자를 찾기 위해 가족 친지나 마을 사람들을 못살게 괴롭혔다. 주열사가 감옥에서 당한 모진 고문으로 죽을 지경에 이르자 구금 117일째 되는 1944년 1월 21일 광주지방법원 순천지청에서 징역 8월에 집행유예 4년을 선고받고 풀려났다. 고문의 후유증으로 4월 8일 열여섯 어린 나이에 꿈에 그리던 조국 독립을 보지 못한 채 ‘좋은 세상이 올 것이다'는 유언을 남기고 승천하였다. 열사의 유해는 의분을 품고 거사를 했던 목화밭 근처에 안장되었다. 우리가 특별히 눈여겨 새겨 볼 글은 日本國(일본국)도라 쓰지 않고 日本局度マケ·일본국도 졌다. 일본은 나라가 아닌 局(국)으로 비하시켰다. 우리말과 글을 쓰지 못한 때라 度(도)는 우리말 토씨 도다. 동양 3국의 말로 표현한 주재년 열사의 천재성과 통찰력, 불타는 애국심을 엿 볼 수 있다. 정부는 여수시가 신청한 독립유공자 포상신청을 심사하여 2006년에 열사의 공훈을 기려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박준영 전라남도지사와 여수시장은 주재년 열사의 숭고한 애국정신을 기리고 후세에 귀감으로 삼기위해 열사가 나고 자란 집터에 기념관을 건립하여 돌산지역 출신으로 독립유공자 훈,포장을 받으신 세분과 함께 선양합니다. 주재년 열사의 서거 68주년을 추념하며 2012년 4월 8일 여수시장 김충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