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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3월 6일 김복현·김강·서정희 등은 숭일학교 교사 최병준 및 수피아여학교 교사 박애순 등과 협의하여 3월 10일 전남 광주의 장날을 이용하여 만세시위를 결행하기로 계획하고 독립선언서를 인쇄하는 등 사전 준비를 진행하였다. 3월 10일 오후 3시 반경, 주도자들은 계획에 따라 광주교 밑 천변에서 수백 명의 군중을 지휘하여 태극기를 앞세우고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천변을 따라 시장으로 진출하여 시위대를 형성하였다. 이들은 이곳을 출발하여 서문통을 경유하여 우편국 앞에 이르러 왼편으로 돌아 본정통으로 행진하였다. 이 때 누문리 방면으로부터 농업학교 학생 등 수백 명의 시위군중이 합세하여 독립만세를 부르며 시내를 행진하였다. 당시 광주 수피아여학교 학생이었던 윤형숙도 동교 학생들과 함께 시위대열에 참가하여 군중의 선두에 서서 태극기를 높이 들고 독립만세를 부르며 행진하였다. 시위대가 행진하는 도중 일본 헌병대가 출동하여 해산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시위대가 해산하지 않자 헌병들은 실탄사격을 감행하며 무자비한 탄압에 나섰다. 일본 헌병은 선두에 있던 그녀의 왼팔을 군도로 내리쳤다. 팔이 잘린 그녀는 잠시 땅에 쓰려졌다가 일어나 오른팔로 태극기를 집어 들고 독립만세를 더욱 크게 불렀다. 이 광경을 목격한 군중들은 비분강개하여 더욱 격렬하게 항거하였다. 그녀는 중상을 당한 채 일경에 체포되어 1919년 4월 30일 광주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4월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4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출처 : 보훈처 공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