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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헌 임병찬 의사 순지비 본관은 평택으로 전라북도 옥구 출신이다. 임용래의 장남으로 태어나 한학을 배웠으며 39살에 낙안군수 겸 순천진관병마 동첨절제사를 역임하였다. 1906년 2월 의병장 최익현과 더불어 태인의 무성서원에서 의병을 일으켜 초모, 군량 및 병사훈련 등의 책임을 맡아 홍주 의병장 민종식과 서로 연락을 맺으면서 태인, 정읍, 순창, 곡성 등 지역을 습격하여 관곡을 취해 군량으로 삼고 진용을 정비하였으나 그해 6월 순창에서 최익현과 함께 적에 의해 체포되었다. 이어 일본헌병에 의해 서울로 압송된 후 감금 2년형을 선고받고 일본의 대마도로 유배되었다가 이듬해 1907년 1월 귀국하였다. 1910년 국권을 상실한 후에는 은거하면서 재차 거의할 것을 도모하던 중 1912년 9월 고종황제가 내린 밀조에 따라 독립의군부를 조직하였다. 그리하여 널리 격문을 발송하고 동지를 초모하는 한편 그 조직을 확대시켜 12월에는 전라남북도 독립의군부 순무대장에 임명되었다. 그 후 1914년 2월 서울로 올라와 이명상, 이인순 등과 상의하여 독립의군부를 전국적인 조직으로 확대시켜 대한독립의군부의 편제로 재조직하였다. 임병찬 의사는 그 총사령이 되어 일제의 내각총리대신 총독 이하 모든 관헌에게 "국권반환요구서"를 보내 일제합병의 부당성을 천명하였을뿐 아니라 외국에 대해서도 일제의 통치에 한국민이 불복하고 있음을 표명하는 한편 국민 대중에게 국권회복의 의기를 일으켜 일시에 일제를 축출하려는 항일의병운동을 계획하였다. 그러나 그해 5월 일본경찰에 의해 그 계획이 사전에 발각되어 임병찬 이하 관련자들이 대거 체포당하여 실패하고 말았다. 체포된 후에 옥중에서 계획이 실패됨을 분개하여 3차례에 걸쳐 자살을 기도하였다. 그 뒤 6월 13일 거문도로 유배되어 옥고를 치르는 동안 은밀히 후학들을 양성하였으며 귤은의 당기를 지은 바 현재 동도 유촌리 귤은사당에 보존되어 오고 있다. 임의사는 1916년 5월 23일(음력) 유배지에서 단식으로 원통한 생애를 마치는 순국을 하여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국민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