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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재 기재(奇宰)의 장자이고 의병장 성재 기삼연의 종손이며 의병장 녹천 고광순의 사위이다. 기독교계 학교의 교사를 지내기도 했던 그는 을사조약이 늑결된 1905년 11월 18일 기필코 매국오적을 처단하고자 박종섭·박경하·안한주·이종대 등과 결사대를 조직하고 권총 세자루에 실탄을 장전하고 단도 네자루를 헝겊으로 싸서 준비를 완료한 후 동지 손성원·박용현·김필현·이태화 등으로 하여금 적신배의 동정을 염탐케 하였다. 그러나 이날 아침 9시경 결사대 본부인 중서 니동 한성모 집에서 경무고문 환산중준(丸山重俊)의 부하에게 그를 비롯하여 박종섭·박경하·안한주·이종대·손성원 등과 결사대 동지가 전원 피체되어 옥고를 치렀다. 1906년 2월 16일 퇴궐한 적신 군부대신 이근택은 내방한 6인의 방문객들과 담화하다가 상오 1시경에 후실과 취침하였다. 이때 의사 세사람이 뛰어들어 이근택을 붙잡고 마구 찔렀다. 당황한 이근택은 전신의 힘을 다하여 촛불을 껐다. 방안이 캄캄해지자 의사들이 닥치는 대로 칼을 내리쳐서 이근택은 10여군데에 중상을 입었다. 이때 이근택의 머슴이 이근택의 신음소리와 그의 후실의 울부짖는 소리를 듣고 방으로 뛰어들다가 자객의 칼을 맞아 얼굴·배·허벅지 등에 상처를 입었다. 이때가 되서야 비로소 소란한 소리를 듣고 이근택의 집을 지키던 병사 6인과 경위원 순검 4인이 달려오고 이근택의 방에 장치하여 둔 설렁줄 소리를 듣고 일제 헌병과 경찰이 뛰어왔다. 그러나 의사들은 담장에 줄사다리를 놓고 도망한 뒤였다. 이때가 17일 상오 2시경이었다. 이근택은 한성병원에 입원 가료한 결과 추한 목숨을 부지하게 되었다. 일제 경찰은 혈안이 되어 의사들을 검거하고자 날뛰었다. 이근택의 집 대청 위에 변장하였던 가발 하나가 단서가 되어 그와 이상철이 피체되어 악형을 받게 되었다. 그와 공모하였던 전 경무사 구완희, 전 경무관 이세진은 도피하여 화를 면하였다. 그가 심문을 받을 때에 동지가 800여 명이 된다고 말하자 매국적신들은 일본헌병까지 끌어들여 집과 신변을 엄하게 경계하였으며 내방객에게 꼭 명함을 받고 몸을 수색한 후에야 들여보내곤 하였다 한다. 모진 고문과 악형을 받고 나온 그는 1920년 임정에 군자금을 송금하려고 동지를 규합하다가 일경에 피체되어 광주지방법원에서 징역 3년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그러나 심한 고문 끝에 다리를 상하여 절름발이가 된 채로 출옥한 그는 일생을 이곳저곳 유랑하다가 전남 장흥에서 병사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출처 : 보훈처 공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