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page


77page

심적암 전투 사적기 광무9년(1905) 을사보호조약으로 국권이 모두 일본에 넘어가자 전국 방방곡곡에서 항일의병이 봉기했다. 특히 임진왜란 때 호국충절의 땅 전남의 의병은 저들의 전남폭도 대토벌작전 문서에서 밝혀진 바와같이 임진왜란의 치욕적 패전을 되씹게 하였으니, 그 문서에 기록하기를 임진란의 옛날을 몽상하여 일본인을 멸시하는 풍조가 있는 고로, 산간 도서의 한민에 이르기까지 일본군의 무위에 경탄 전율케하여 일본 역사상의 근본적인 명예 회복을 도모하지 않으면 안된다." 라고 했다.. 1910년 한일합병 전야에 4년간에 거려 자행한 저들의 남한폭도 대토벌작전은 사나운 짐승으로도 차마 못할 정도로 잔혹한 행위였다. 그 참상을 황현은 그의 저서 '매천야록'에서 사방을 그물 치듯이 포위해 놓고 집집마다 빗듯이 뒤져 조금이라도 의심이 가면 즉시 죽였다. 의병들은 숨을 곳이 없어 강한 자는 앞으로 돌진하여 싸워서 죽고, 약한자는 달아나다 칼을 맞았다. 점차 쫓기어 강진, 해남 땅에 이르니 땅이 다하여 죽은 자가 수천 명에 이르렀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 마지막 땅 해남에서 벌어진 심적암 전투에 관혀여 저들의 경찰문서 전남폭도사는 "1910년 7월 8일 밤, 해남수비대장 요시하라 대위 이하 22명, 경찰관 3명, 헌병 4명이 적도 토벌을 목적으로 대흥사로 출동했다. 1909년 7월 9일 오전 4시, 이 절을 포위 공격했는데 적도는 깊이 잠들고 있었기 때문에 어찌할 바를 모르로 있다가 전멸했다. 적22명을 죽이고 8명을 포로로 했으며 화승총 47, 군도5를 노획했다. 9월 18일 수괴 황두일의 부하 21명, 19일 4명이 해남수비대에 투항했다"라고 적고 있다. 황준성의 재판기록에서 밝혀진 심적암전투 지도자는 황준성, 황두일, 추기엽, 강성택 등 4인이며, 참전의병의 총수는 최소한 65명 이상으로 추산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