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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성지(梨津城址) 전라남도 기념물 제120호 / 전라남도 해남군 북평면 이진리 1227 성지란 돌이나 흙으로 일정지역을 보호하고 행정이나 군사의 중심지로 활용하기 위해 많은 건축물의 터를 말한다. 이 성은 고려시대 후기에 왜구가 침입함을 막기 위하여 해안의 요충지에 방어시설을 갖추기 시작하면서 세워졌다. 조선 명종 10년(1555) 을묘왜변이 일어나자 이곳이 방어가 특히 중요시되면서 더욱 강화되었다. 이후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수군만호의 책임아래 병선과 수군이 배치되고, 군량과 무기의 완전한 보관과 인근 주민의 피신처로 성벽이 다시 정비되었다. 성은 남.북이 높고 중앙이 낮은 분지형으로 마을을 에워싸고 있다. 성벽은 바깥을 돌로 쌓고, 안쪽은 자갈과 흙으로 채우는 내탁법을 사용하였다. 성안에는 두 곳의 샘과 객사.동헌.군기고 등의 건물이 외곽으로는 1차적으로 방어시설인 해자와 목책을 두었다. 현재 서문터에서는 폭 3m, 높이 5m, 길이 34m의 옹성(성문을 방어하기 위한 시설)과 문에 사용되었던 초석 2개가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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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성지(梨津城址) 성지란 돌이나 흙으로 일정지역을 보호하고 행성이나 군사의 중심지로 활용하기 위해 쌓은 건축물의 터를 말한다. 이 성은 고려시대 후기에 왜구가 침입항을 막기 위하여 해안의 요충지에 방어시설을 갖추기 시작하면서 세워졌다. 조선 영종 10년(1555) 을묘왜변이 일어나자 이곳이 방어에 특히 중요시되면서 더욱 강화되었다. 이후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수군만호의 책임아래 병선과 수군이 배치되고 군량과 무기의 완전한 보관의 인근 주민의 피신처로 성벽이 다시 정비되었다. 성은 남.북이 높고 중앙이 낮은 분지형으로 마을을 에워싸고 있다. 성벽은 바깥을 돌로 쌓고, 안쪽은 자갈과 흙을 채우는 내탁법을 사용하몄다. 성안에는 두곳의 샘과 객사, 동헌, 군기고등의 건물이 외곡으로는 1차적인 방어시설인 해자와 목책을 두었다. 현재 서문터에는 폭3m,높이 5m, 길이34m의 옹성(성문을 방어하기 위한 시설)과 문에 사용되었던 초석 2개가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