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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로나면서 피체되어 4년여간의 옥고를 치렀다. 당시 사건은 관련자 3,200여명, 전남 10개 시.군에 걸쳐서 구속자만 558명이었다. 1946년 대구 10월 항쟁사건이 전국적으로 확대되면서 해남에도 11월 11일「추수봉기」라는 민중항쟁이 발발하고 선생은 이 사건을 주도한 혐의로 해방된 조국에서 또 다시 길고 고통스러운 囹圄(영어)의 몸이 되었다가 한국전쟁 발발 직전에 만기출소한다. 그러나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이승만이 그들의 정권유지를 위해「국민보도연맹사건」이라는 대 학살극을 벌이는데 선생도 이 참극을 피하지 못하고 1950년 7월 16일 전라남도 진도군 의신면 구자도리(갈매기섬)에서 경찰에 의해 학살당하시어 파란만장한 생을 마감한다. 아! 참으로 분하고 원통하도다. 암울한 일제치하에 태어나시어 전 생애를 오로지 조국의 광복과 자주통일을 외치다가 피어보지도 못한 채 그토록 바라던 해방된 조국에서 국가 공권력에 의해 비명에 가셨으니 이 어찌 원통하고 애석하지 않을소냐! 선생은 분명 한 시대를 풍미한 풍운아일진데 고매한 기상과 출중한 인품을 갖추셨으면서도 개인의 입신출세와 가족의 부귀영달을 위해서는 단 한순간도 살아보지 못한 선생의 생애가 너무도 억울하고 애통할 따름이다. 2015년 10월 24일 자로 선생의 명예회복을 위해서 대한민국 정부를 상대로 손해배상청구 소송을 제기해서 승소판결을 받아내고 국가로부터 사과도 받아냈다. 여기 백여년전에 조상님들이 마련해 놓으신 吉地(길지)에 두 아들과 손자.손녀들이 온갖 정성을 다 들여 선생의 행적을 기록한 묘비를 세우고 추모의 情(정)을 새기고저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