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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서에 피체되고 마산형무소에서 두번째로 2년의 옥고를 치뤘다. 출옥 후 옥고를 풀 틈도 없이 상해로 다시 들어가려다가 이번에는 신의주 국경에서 피체되어 세번째로 서대문감옥에서 2년간 옥고를 치뤘다. 그러나 일제의 혹독한 강압도 열사의 투지를 꺾지 못하였으니 다시금 임정의 밀명을 띄고 국내로 돌아온 열사는 고학생들을 포섭하여 갈돕회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이들로 하여금 전국을 돌며 정보교환과 애국사상 앙양고취에 주력하였다. 이들의 활동상황은 수시로 상해임시정부에 보고되었으며 열사는 이 갈돕회를 끝까지 배후에서 지휘하였다. 1931년 11월 20일 상해임시정부의 내무장 조완구와 재무장 김구의 지령으로 열사는 임시정부의 경상남북도 상주대표로 임명되었다. 거기에는 다음 세가지 비밀지령이 내려졌으니 첫째로 애국지사간의 연락이요 둘째는 광복운동에 필요한 지방의 비밀조직 결성이며 끝으로 국내에서 자금을 조달하여 보내는 임무였다. 이러한 중책을 띄고 진주의 허만 정달성의 문대효 창녕의 성락문 등을 찾아 임정의 활동자금 헌납을 종용하는 등 맡은 바 임무수행을 위해 주야를 불원하고 동분서주하였다. 그야말로 조국광복의 그날을 기약하며 고달픈 풍찬노숙을 거듭하는 나날이었다. 그러나 일경의 집요한 감시는 열사의 활동을 탐지하게 되어 다시 마산경찰서에 피체되었으며 부산형무소에서 손발톱을 뽑히는 고행 속에 6년형의 옥고를 치르게 되었다. 열사의 끊임없는 조국 광복활동은 극렬항일투사로 몰려 일제관헌의 잔인한 가학과 형언조차 할 수 없는 혹독한 고문의 표적이 되었으나 구국일념에 불타는 강인한 의지는 결코 꺾이지 않았다. 수형 중 고문의 여독으로 끝내 순국하니 때는 바로 1933년 음력 1월 20일이며 향년 47세였다. 오호와 천인공로할 일제의 만행은 형기가 끝나지 않았다하여 열사의 묘소마저 철조망으로 얽었으니 이 어찌 통분을 금할 수 있으리요. 꿈많은 젊은 나이에 일찍이 구국운동 대열에 몸을 던져 온갖 고난과 영욕을 무릅쓰고 열화같은 우국애정으로 한몸을 구국의 화신으로 불사른 송죽같이 고절한 일생이었다. 비록 육신은 비참하게 꺾여져 땅속에 묻혔으나 거룩한 열사의 얼은 겨레의 가슴속에 불멸의 등불이 되어 마침내 1945년 8월 15일 조국광복의 날을 맞이하게 되었다. 임시정부 김구 주석은 1946년 9월 17일 창원군 진전면 산골의 초라한 옛 동지의 묘소를 참배하고 애도의 뜻을 표했으며 유족을 위로하였다. 1954년 마산일보(현 경남신문) 김형윤 사장은 열사의 애국충절을 기리고자 추모회를 조직하여 지역 유지의 협찬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