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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야로 시탕을 받들다가 상을 당해서는 지극한 슬픔속에서 예절틀 준수하였으며 새어머님 전주이씨를 지성으로 섬겼다. 11세때 이 마을 평암에 이거한 후 아버님이 세운 정심재에서 학업에 열중하여 불과 13세에 사서삼경을 통달하였다. 1896년 유인석 허위의 의병군문으로 달려가 함게 왜적과 싸우려 했으나 친환으로 참여하지못하였고 1900년부터 연재 송병선의 문하에서 수학중 1905년 을사보호조약이 체겱되자 의분을 금치 못하여 비장한 상소를 올렸다. 경술국치를 당하여 호곡을 계속하다가 침략군의 우두머리 장곡천에게 강력한 항의서를 전달하니 이후로 왜경의 감시를 받기시작하였다. 1919년 3.1독립운동 일어나 요원의 불길처럼 전국으로 번질즈음 선생은 장남인 병대와 제자인 남병희 김상집 박노일 홍종근 조위제등을 인솔하고 3월 19일 함안읍 독립만세 시위의 선두에 나섰고 이날 오후 마산에서 급파된 왜헌병대에 체포되여 혹독한 고문끝에 3년의 형을 선고받았다.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는 동안 무한한 미회도 만치마는 오직 광복 절천시 48수를 지어 재소자들의 가슴에 항일정신을 불을 질렀고 형기를 마치고 출옥한 후에는 아사동맹회를 조직하기도 하다가 1943년 3월 26일 꿈에도 그리던 조국광복을 못보신채 향년 64세로 서거하였다. 배위는 의령남씨 석원의 따님으로 7남 1녀를 두었으니 남에 병대 병화 병숙 병도 병곤 병길 병국 여서는 진양 정대교이며 손이 35인이다. 1968년 3월 1일 정부에서 독립유공자로 대통령표창을 추서하고 수년전에 인근 열군에 기념사업회에서 유서깊은 이 서암정에 선생의 창의비를 건립하기위해 홍한순회장과 조성래 총무가 서암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