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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언각(永言閣) 영언각은 1893년 고종황제(高宗皇帝)께서 진해현 북면 이목동(현 진북면 이목리)의 효자(孝子) 이국로(梨村公, 李國魯)에게 동몽교관 조봉대부(童蒙教官朝大夫)의 벼슬과 함께 하사(下賜) 하신 정려각(旌閭閣)이다. 이촌공(梨村公)은 효령대군(孝寧大君)의 15대손이며 1755년부터 1834년까지 평생을 농부로 지내셨다. 어릴 때 부터 부모를 섬기는 정성이 지극하여 좋은 과일을 얻으면 먼저 입에 넣는 일이 없었으며 낮에는 나무를 하고 밤에는 자리를 엮어다 팔아서 계절에 따라 특별히 나오는 어물은 반드시 구하여 부모의 반찬을 해드리니 해마다 예가 되었다. 드디어 어물 장사들이 감동하여 좋은 생선이 있으면 차마 먼저 판사람에게 팔지 않았다고 한다. 이촌공(梨村公)은 아버님(軍公 李世甲)께서 찰떡을 즐기시어 해마다 두마지기 찰벼를 심었는데 1814년(甲戌年) 가뭄이 극심하여 들판이 모두 말라가는데 밤을 세워 하늘을 우러러 부모에게 뭣을 잡수시게 할 것인가 울부짖었더니 그 논 주변에만 단비가 내려 사람들이 모두 하늘이 감응하는 효자의 비라고 하였다. 또한 아버지가 팔순이 되는 해 몸이 병약해지셔서 잉어기름을 약으로 써야하는데 구할 수가 없어서 의령시장에 갔으나 구하지 못하고 정암(鼎巖)나루를 건너오는데 잉어 한 마리가 나룻배에 뛰어올라 사람들이 효자의 고기라고 말하면서 공에게 양보하기도 하였다. 이촌공(梨村公)이 칠순이 되었을 때 앞뒤로 부모상을 당하여 염습과 장례와 소 대상과 제사를 한결같이 예법에 公)이 따라 행하고 발인하는 날에는 피눈물이 상복을 적시니 행객들도 모두 그를 위로하고 슬퍼하였다. 공이 삼년상 기간 동안에 날마다 묘소를 찾아서 뵈옵는데 추위와 더위와 바람과 비 때문에 폐한 적이 없으시며 돌아올 때 산길이 어두우면 두 마리의 범이 나타나 호위하였다 한다. 이촌공(梨村公)의 효행 행적(孝行 行蹟)은 명륜록 효행편(明倫錄 孝行篇), 잠현보감 효자편(잠 潜絃寶鑑 孝子篇), 진해지(鎭海誌) 등에 등재되어있고, 최익현(月城 崔益鉉), 이재완(完順君 李載完), 조성가(月皐 趙性家) 정재규(八溪 鄭載圭) 외 영남유림(嶺南儒林), 정기원(鄭其元) 등 200여명의 유학(幼學)들의 품장에도 설명되어 있다. 실기에 기록된 외에 야사로 전하는 효자(孝子)의 미담(美談)과 효자마을을 찬양(讚揚)하는 노래가 오래되면 될수록 번져가서 농부, 어부, 목동, 초동 그리고 행상들이 다같이 외치는 소리가 경향각지(京鄕各地)로 번지고 하늘에 이르니 경상도(慶尙道) 선비들이 발을 싸매고 연이어 부르짖음으로서 60년만에 대궐(大闕)의 문을 열었다. 은전(恩典)의 교지(敎旨)와 예조입안(禮曹入案), 예조관문(禮曹關文), 순영관문(巡營關文), 상언(上言), 향장(鄕狀), 이장(里狀), 면장(面狀), 도장(道狀), 보장(報狀) 등 문헌(文獻)이 잘 보존되어 있다. 영언각은 그 동안 주로 후손들이 몇 차례 중수하였으나 1994년에는 창원군이 또 2010년에는 마산시가 문화유산보호(文化遺産保護) 차원에서 재정지원하였다. 2010년 봄 마산시장 황철곤 孝子 李國魯 記念碑(효자 이국로 기념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