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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곡초등학교 창건기 주나라의 교육기관이나 순임금의 교화를 맡은 관리들은 대체로 백성을 가르쳐서 세속의 이치를 밝히는 것이 우선이었다. 이로써 옛날이나 지금이나 집에서는 가숙(집안 서당), 고을에서는 태학을 두어 나라에서 학문의 명소를 두지 아니한 바 없었다. 돌아보건대 우리 한국은 왜적의 침략으로 혹독한 피래를 입어 백성의 교화를 힘쓰지 못하고 피폐하기가 이와 같은 지경에 이르렀다. 반곡의 작은 고을에서 교육기관의 시설은 쓸쓸하고 볼 것이 없어서 뜻있는 분들로 하여금 한탄스러움을 금할 수 가 없음이라. 이에 정해(丁亥=1947)년에 고인이 되신 권달룡 공이 안타까이 여겨서 이 지방 동지들과 함께 반곡학교를 세우고자하여 신축하게 되었다. 기성회에서도 경향 각지로 돌아다니면서 의연금을 모금하여 본교의 성립을 보게되었다. 본교를 도우신 뜻이 높은 그 분의 공이 지대했지만 불행하게도 중도에 서거한 분이 있어서 그 떠난 바가 애석하기도 하다. 이제 또 병신(丙申)년에 다행히도 많은 선비들의 희사를 얻어서, 비로소 학교의 면목을 갖추고 실지로 이 지역 교육의 제 일장이 되었으니 큰 다행이라 아니할 수 없다. 이즈음에 낙성을 하였는데 비문 기록이 없음이라, 어느 때에 기성회를 맡고 있는 벗인 김상규군이 나에게 기록을 청하여 권하는 고로 사양하고 사양하다가 나도 또한 교육의 삼락(得天下英才 而敎育之 三樂也)을 느낀바 있어 삼가 오른쪽과 같이 그 전말을 쓰노라. 또한 희사(토지)방명을 왼쪽에 기록하노라. 1956년 병신 8월 그믐 경주 이종운 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