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page


8page

혁과 학제개혁을 보다 중요한 급선무라고 본 선생은 전제개혁을 제출 자신이 직접 토지측량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선생은 당시 국정 혼란의 근본적 원인이 독선적인 한학의 유폐에 있다고 지적 한문학의 철폐를 주장하고 국문의 활용을 역설하며 소 중 대학의 학제와 덕육 지육 예육을 내용으로 하는 새교육의 실시를 주장한 선생은 현대문명의 선구적 지도자가 되었다. 선생은 당시 정치의 부패와 도탄에 빠진 민생의 참상을 통감하고 동학군이 봉기할 때에 그들과 제휴하여 당시의 정치를 문란케한 민씨일당과 가렴주구를 일삼는 탐관오리와 권문세족의 횡포를 제거하고 헌정을 바로 세우는데 직접 행동을 하려는 뜻도 세운바 있었으나 사정이 여의치 않아 동학군과 끝까지 같이 할 수는 없었다. 당시 외세의 침략으로 국권이 경각에 있음을 통감한 선생은 수시로 구국책을 정부에 제의하고 국민에게 호소하여 위정자의 자성과 국민의 분발을 촉구하였다. 그런데도 날로 심해지는 일제의 침략을 막아내기 위하여 국내외에서 항일운동을 벌여야 할 선생은 동지들을 규합하여 직접 일본에 건너가 침략자의 수뇌들과 서면투쟁을 벌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항쟁의 보람없이 을사조약이 체결된 뒤에는 한성사범학교의 교관으로 후진을 양성하는 한편 1906년 장지연 윤효정 등과 함께 대한자강회를 조직하여 필봉으로서의 항일운동과 민중계몽에 전력을 다하였다. 한편 민족